미중 합의와 강노지말(强弩之末)

[글로벌 리포트 | 중국] 이재호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이재호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1126년 북송의 수도 카이펑을 공격해 휘종과 흠종 2명의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중국의 한족이 가장 치욕적인 역사적 사건 중 하나로 손꼽는 ‘정강의 변’이다. 북송이 멸망하고 들어선 남송은 금나라는 물론 뒤이어 등장한 몽고족의 원나라에게도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평화를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치욕은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하는 ‘강한성당(强漢盛唐·강력한 한나라와 번성한 당나라)’ 시절에도 있었다. 대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던 한 고조 유방은 거꾸로 포위돼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흉노를 형으로 모시며 곡식과 옷감 등을 조공하는 내용의 화친 조약을 체결했다. 당 태종도 지금의 티베트에서 일어난 토번이 위세를 떨치자 종실 여인인 문성공주를 시집보내고서야 화의를 맺을 수 있었다. 외세의 침입 때 금전적 보상으로 평화를 구하는 대처는 중국 역사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런 평화가 오랜 기간 유지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무역협상 1단계 합의안에 서명했다. 2018년 3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된 지 22개월 만이다. 지리한 공방 끝에 얻어낸 성과라 양측 모두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유리한 합의라고 자평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중국과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유익한 결과라는 평가를 내놨다. 영문 기준으로 96쪽 분량의 합의문은 지식재산권 보호, 강제 기술이전 금지, 환율 조작 금지, 금융시장 개방 등이 망라돼 있다. 온갖 추측을 낳았던 중국의 대미 추가 수입액 규모도 드러났다. 중국은 향후 2년간 미국산 농산물·공산품·에너지와 서비스 재화의 수입을 2000억 달러(약 232조원) 확대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대중 관세를 일부 유예하거나 완화했다. 중국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보복 관세 전면 철회는 이끌어내지 못했다.


기자와 만난 한 중국 경제학자는 일괄 합의를 주장하던 트럼프 대통령이 단계적 합의 방식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중국도 부분적 관세 철회에 만족키로 한 모양새라고 전했다. 다만 이번 합의 결과가 미국에 훨씬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중국이 돈으로 일시적 평화를 샀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를 의식한 듯 중국 당국과 주요 언론은 한목소리로 ‘상호 평등한 합의’라고 강변하고 있다.


엄밀히 얘기하면 2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들여 구매한 것은 ‘시간’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및 재선 성공 여부가 드러날 올 연말까지, 더 나아가 1단계 합의 이행 과정이나 2단계 협상 중 마찰을 빚기 전까지는 ‘무역전쟁 리스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중국은 미국의 추가 관세 부과나 시장 개방 확대에 따른 대응책을 수립하는 한편 2단계 협상 전략을 마련하는데 부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역전쟁 장기화로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할 여유를 얻은 셈이다. 미·중 협상은 단계가 거듭될수록 격렬해질 것이다. 산업 구조 개편과 정부 보조금 폐지, 환율 자율화, 인터넷 완전 개방 등은 중국식 시장 경제 앞의 ‘사회주의’ 수식어가 사라지지 않는 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들이다. 1단계 합의를 돈으로 산 휴전 혹은 잠정적 소강 국면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 고조 유방 이래로 70년 가까이 이어지던 한나라와 흉노 간의 평화는 한무제가 칼을 빼 들면서 깨졌다. 어사대부 한안국은 “강한 쇠뇌의 화살이 나중에는 힘이 약해져 노나라 얇은 비단조차 뚫기 어려운 것처럼 강한 군사도 먼 원정을 떠나면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며 반대했다. 강성한 세력도 끝내 쇠퇴한다는 ‘강노지말(强弩之末)’ 고사의 유래다. 중국은 미국의 힘이 다하기를 기다리며 지구전으로 맞설 요량이지만 미국이 쏘아 보낸 화살의 기세가 여간해서는 꺾일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한나라와 흉노의 사생결단은 전한의 멸망과 흉노의 분열이라는 양패구상으로 끝났다. 미·중 간 위태로운 평화는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