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 100년을 맞았다. 100년 역사에 공도, 과도 많겠지만 언론자유를 선언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기자들을 집단 해고한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다. 50여년 전 적지 않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이 유신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우다 길거리로 내몰렸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언론사도, 국가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기자협회보는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 최병선 조선투위 위원 인터뷰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53년 전인 1967년 11월, 기자 22명이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동아일보 10기 수습기자들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다툼의 여지없이 1등 신문이었다. 사세가 크게 확장되던 무렵이라 그 즈음 매년 20여명씩 신입사원을 뽑았다. 박종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도 10기 기자 중 한 명이었다.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사이 자유의 세례를 받으며 대학에 다녔던 박종만 위원은 부푼 꿈을 안고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앞두고 비판적인 언론과 기자들을 탄압과 지원으로 회유하던 때였다. 중앙정보부 요원은 물론 경찰과 군 요원 등 기관원들이 수시로 편집국을 들락거렸다. 비판적인 보도를 계속하던 동아일보는 특히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1968년 12월 ‘신동아 필화사건’으로 편집 간부 2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진 건 어찌 보면 예정된 수순이었고,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동아일보는 정권에 굴복해 천관우 주필 등 3명을 해직시켰다. 이후 한국 언론은 1969년 3선 개헌 파동을 거쳐 1971년 대선을 앞두기까지 그야말로 “시들부들”해지는 과정을 겪었다.
“이 무렵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시위를 벌이던 대학가에선 언론에 대한 비난과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집회와 시위 현장엔 ‘기관원과 기자와 개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등장했고, 71년 3월 말 즈음엔 동아일보 사옥 앞에 서울대 학생들이 몰려와 언론화형선언문을 읽고 화형식을 했어요. 그 때 제 나이 20대 후반이었는데 신문기자를 한다는 자체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가는 시위로 하루도 쉴 날 없이 최루가스로 덮여 있는데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어요. 군인이 학생들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가마니 쌓듯이 차에 쌓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눈물 흘리며 기사를 쓰고 송고해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대체 뭔가’ 자괴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박 위원을 비롯해 괴로워하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1년 4월15일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결행했다. 진실보도와 함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하고 기관원들의 출입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선언은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듬해 10월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보도할 자유와 함께 보도하지 않을 자유도 사라져, 유신헌법에 대한 어쭙잖은 해설기사를 글자 하나 수정하지 못하고 실어야 했다. 박 위원 개인적으로는 방위병이 변심한 애인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을 기사화했다 군과 민을 이간질했다는 이유로 남산 밑 육군수사대에서 심문을 받기도 했다. “기자를 때려치우든가, 월급쟁이로 남든가, 적극적으로 정권에 빌붙든가” 세 가지 선택지만 남은 시기였다.
1973년 가을 들어 다시 대학가에 시위 열풍이 불어 닥쳐도 언론은 여전히 침묵했다. 보다 못한 동아일보 기자들은 10월부터 두어 달 동안 기사가 제대로 보도되지 않을 때마다 항의의 의미로 편집국 안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11월엔 제2차 언론자유 수호선언, 또 얼마 후엔 제3차 수호선언을 발표했다. 1974년 들어선 조직된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전격적으로 노조를 설립했지만 박 위원을 포함한 20여명이 해고되고 다시 복직되는 시련을 겪었다. 결국 기자들은 한국기자협회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기로 하고 기자협회장과 분회장을 새로 구성해 10월24일, 역사적인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전의 선언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경영진과의 실랑이 끝에 선언문 전문을 동아일보 1면에 보도하는 데도 성공했다.
“선언문이 실리니 전국 각지 언론사들이 모두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바뀌겠어요. 그 뒤엔 본격적인 사내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분회 안에 자유언론실천을 위한 특위를 만들어 매일 일과 후에 그날 신문에 대한 평가 회의를 열었고, 제대로 기사가 나오지 않으면 제작을 거부해 결호가 나오기도 했어요. 그러고 나선 점점 눈에 띄게 신문이 바뀌어 갔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그대로 놔둘 수 없잖아요. 12월 중순부터 광고주 압박으로 광고가 끊기기 시작했고 백지광고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후엔 본격적인 개인들의 격려 광고가 쏟아졌어요. 평생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본 때가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회사 분위기가 변한 건 1975년 2월 들어서였다. 3월8일 동아일보는 경영 합리화에 따른 기구 축소라는 명분으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주도한 안성열 기자를 포함해 18명을 해고했다. 기자들이 농성에 들어가자 17일 기자 17명을 또 해고했다. 박 위원도 여기 포함됐다. 그의 나이 33살, 기자 생활 7년을 넘어서던 무렵이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강제 해직당하거나 무기 정직당해 회사 밖으로 쫓겨난 기자와 PD, 엔지니어 등 134명은 다음날인 18일 동아투위를 결성하고 언론자유 투쟁을 이어나갔다. 종로경찰서에서 16차례나 경고장을 받았지만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시위와 행진을 벌였다. 수사 정보기관은 매번 이들의 행동을 감시했고 사소한 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고 가 몇 시간씩 조사를 하는 일도 허다했다.
“집회는 6개월간 이어졌습니다. 이후엔 도저히 생활이 안 되니 각자 생업을 찾기로 했는데, 취업도 안 되고 해외여행도 안 되는 일종의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살아야 했어요. 결국 13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남대문시장 옆 새로나백화점 지하에서 음식장사를 했는데 몇 달 못하고 접었습니다. 이후 여러 가지 일을 하다 1978년 ‘보도되지 않은 민주 민권사건 일지’를 제가 정리하게 됐습니다. 그걸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에 발표했는데 행사가 끝나자마자 종로서 정보과 형사가 홍종민 기자를 끌고 가고 다음날엔 저를 포함, 세 사람을 연행해 갔어요. 그렇게 구속이 돼 1년 후에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봄’을 맞이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980년 5월 즈음 동아투위 세미나를 열고 있는데, 대학생들이 연행되고 있으니 피하는 게 좋겠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말고 흩어지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홍종민 기자와 동대문운동장과 계림극장 등에서 시간을 때웠는데, 홍 기자가 집에 들어간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은 기분이 나쁘니 일단 피하자’고 말렸는데 부득부득 집으로 들어갔어요. 홍 기자는 그렇게 아파트 입구에서 잡혀 남영동으로 갔습니다. 한 3주 있다 나왔는데 고문으로 거의 폐인이 돼 있었어요. 내가 막았어야 하는데 그걸 막지 못해서 그 친구가 죽었다는 죄책감이 아직도 있습니다.”
박 위원 역시 두어 달 도망 다니다 집에 들어간 직후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집 문을 두드렸다고 박 위원은 기억했다. 다행히 고문을 당하진 않았지만 일주일 후 남영동에서 나왔을 땐 동아투위 사무실은 폐쇄되고 모든 자료가 사라진 후였다. 이후 그는 어린이 출판사 등에서 일하거나 사사(社史)를 쓰며 생업을 이어갔다. 국민일보, 평화방송, 전자신문 등에도 적을 뒀다.
그 긴 기간 동안 동아일보와 국가는 박 위원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그동안 113명 동아투위 위원 중 30명이 세상을 떠났다. 5년 후엔 절반 정도만 남을 수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동아일보에 큰 기대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도 사과하라는 것 아니던가요. 2018년엔 진실화해위 권고를 이행하라는 국민 청원도 했는데, 오래된 얘기고 하니 서명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 와서 다 늙은 사람들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보상을 바라겠어요. 무엇보다 사과가 우선돼야 합니다. 그 많은 세월 그런 일을 당한 것엔 정부의 책임이 큽니다.”
박 위원은 ‘기레기’로 욕 먹기 일쑤인 젊은 기자들에게도 당부했다. “지금 욕을 먹는 언론을 보면 서울대 학생들의 언론화형선언문이 다시금 생각납니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선악이 불분명하고 워낙 업무량도 많아 양식 있는 기자들도 확인 취재를 제대로 못하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것만으론 변명이 안 돼요. 내가 왜 기자를 하고 있나, 그걸 먼저 생각했으면 합니다. 한편으론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곳곳에서 고뇌하며 언론인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기자들이 곳곳에 숨어 있으리라 봅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정도의 자유언론을 실천하기 위해서 힘을 모아줬으면 좋겠어요. 젊은 기자들이 힘을 합쳐 헤쳐 나가면 우리 언론이 다시 봄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희망을 가집시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