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우선주의 보도 확대하기

[언론 다시보기] 김민정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김민정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2000년대 초 교도소가 가장 많은 미국 도시에서 ‘피해자학(victimology)’을 수강한 후, 범죄자 중심의 우리나라 형사사법 시스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피해자학은 형사정책의 목적이 가해자가 저지른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된다고 본다. 가해자 중심의 형사정책이 수사과정에서의 피의자 인권보호, 처벌, 교화, 재발방지책 등을 중점으로 하는 것이라면, 피해자 우선주의 형사정책은 피해자를 그저 ‘증인’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피해자 지원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힘의 역전>(2020) 참고). 필자는 언론보도에 있어서도 이러한 관점 전환이 시급하다고 본다.


‘피해자 우선주의 보도’는 먼저, 피해자나 가족에게 2차 피해를 유발하지 않으며, 피해자 신원보호와 사생활 보호를 위해 관련 보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의 ‘피해자 보호 우선하기’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통상적인 이해를 넘어, 더 적극적인 차원의 피해자 우선주의 보도를 생각해 본다.


텔레그램을 매개로 발생한 집단 성착취 범죄 관련 최근 보도를 보자. 조주빈에게 마이크를 쥐여주고 서사(narrative)를 부여하는 보도, 조주빈에 관한 시시콜콜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담은 보도, 조주빈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 가지 뻗기 하는 보도 등 가해자를 중심에 둔 보도가 다수이다. 그의 악랄함과 치밀함을 강조하든 혹은 그의 평범함을 강조하든, 이는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 가해자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주는 보도인 동시에 피해자를 소외시키는 보도이다. 반면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피해자의 모습, 가해자들에 둘러싸여 괴로워하고 있는 피해자를 보여주는 보도는 피해자를 무기력한 존재로 정형화하고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심지어는 피해자 책임론을 제기하는 누리꾼의 목소리를 은근슬쩍 전하는 보도도 있다. 피해자를 피해자로 만든 사회구조에 대한 보도, 가령 1990년대에 시작된 가정의 해체로 가출이 늘어나고, 청소년들이 스마트폰 앱을 통해 모르는 이를 만나고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 현실이 맞물려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에 대한 진단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보도는 찾기 힘들다.


나아가 다른 주제 영역으로 피해자 우선주의 보도를 확대하는 것도 필요하다. 숙명여대 법학부에 2020년 신입생으로 합격했던 트랜스젠더 학생 관련 보도에서 드러났듯이 특정인의 정체성을 이유로 그를 공격하는 상황이 발생한 경우 형식적 중립을 지켜 가해자의 관점과 피해자의 관점을 동등한 무게로 보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양자 간의 권력 관계가 명백하고, 정체성에 대한 공격이 사회적 차원에서의 배제와 차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를 더욱 공고히 하고 확산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 더구나 가해자의 발언이 초래할 피해자 인권 침해가 심각한 상황에서 가해자의 목소리를 무분별하게 중계하는 것은 가해자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낳고 가해를 증폭시키며 인권을 찬반의 문제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양측의 입장을 동등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목소리 혹은 피해자를 지지하는 측의 목소리에 방점을 두고 보도하는 피해자 우선주의 보도를 실천해야 한다. 액자를 걸기 위해 벽에 못을 박을 때 잡아야 할 무게 중심은 못 전체 길이의 절반 지점이 아니다. 못 전체 길이의 10분의 9가 벽 안으로 들어가야 액자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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