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스타디움'과 3루 기자들

[글로벌 리포트 | 일본] 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질문 아직 남았습니다.”


2월29일 주말 저녁,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코로나19와 관련 첫 기자회견. 사회를 본 내각 공보관이 회견 종료를 알리려는 순간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에가와 쇼코씨가 손을 번쩍 들었다. “왜 제대로 답하지 않나요?”, “물을 기회를 주세요”라고 소리쳤다. 총리는 못 들은 척 그대로 회견장을 나가 버렸다.


회견은 36분짜리였다. 회견문 읽는데 19분, ‘관저 기자클럽’ 질문 5개에 답하는데 17분을 썼다. ‘관저 기자클럽’은 우리로 치면 청와대 출입기자단이다. 전반부가 준비된 각본을 토대로 한 ‘1인극’이라면 후반부는 권력과 언론이 진검 들고 싸우는 ‘생쇼’에 가깝다. ‘연극’과 ‘생쇼’, 어느 쪽이 흥미로운지는 다들 안다.


그러나 이날 회견에는 ‘생생함’도 ‘긴박감’도 없었다. 질문을 던지면 아베 총리는 단상 위 종이를 흘깃 보며 모범 답변을 읽어갔다. 회견 하루 전날 기자클럽이 미리 질문을 취합해 관저 측에 전달한 덕분이었다. 총리 입장에선 ‘아무 질문’이 아닌 ‘아는 질문’이었던 셈. 총리와 기자가 ‘짜고 치는’ 연극은 관저의 오랜 관행이었다.
“총리 이대로 끝내지 마세요.” “이걸 회견이라 할 수 있나요?”


2주 뒤 열린 두 번째 기자회견. 소동은 더 커졌다. 공보관이 회견을 마치려 할 때마다 기자들 항의가 빗발쳤다. 결국 1차 회견에 비해 질문한 기자는 5명에서 12명으로, 회견 시간도 36분에서 53분으로 늘었다. 아베 총리의 쓴웃음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정작 회견장에 에가와 기자는 없었다. 기자클럽의 반란, 놀라운 건 이튿날 지면이었다.


“회견 전날 저녁 7시 반쯤 관저 공보관이 ‘캡’(1진 기자) 휴대전화로 연락해 왔다. ‘내일 어떤 질문을 할지 각사에 묻고 있다’고 했다. ‘캡’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이 모두 끝날 때까지 회견을 진행하고, 프리랜서 기자를 포함해 모두에게 공평한 질문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아사히신문 기사 中)


이게 놀랄 일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주류 매체 중심인 일본 기자클럽의 뿌리 깊은 폐쇄성과 배타성에 비춰보면 꽤 ‘의미 있는’ 변화였다. 이날 회견에서 공보관이 질문자를 지목할 때 ‘뒤쪽에 흰옷 입으신 분’이라고 호칭한 일은 과거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마이니치 기자들이 지난 2월에 펴낸 책 <더러운 벚꽃, ‘벚꽃을 보는 모임’ 의혹 추적 49일>에는 정치 취재의 폐해가 자주 언급된다. “기자회견 등 공개된 장소가 아닌 물 밑에서 입수한 ‘독자 정보’를 중시하는 게 정치 기자의 문화”라고 썼다. 이 때문에 취재원은 ‘오프’(비보도)를 남발하고, 기자는 자신에게만 정보가 오지 않을 거란 두려움에 이런 요구에 순응해 왔다는 고백이다.


이런 대목도 나온다. ‘벚꽃을 보는 모임’ 의혹이 한창이던 지난해 11월20일. 아베 총리와 각사 캡의 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총리의 ‘비공식’ 해명 자리였다. 마이니치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총리 육성을 듣는 건 가치 있겠지만, ‘비보도’ 전제여서 기사를 못 쓰는 이상 참석에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독자들은 ‘불참하는 용기’에 호응했다.


일본 정계는 오랜 기간 ‘아베 1강’이다. 야구장에 비유하자면 ‘아베 스타디움’의 1루 관중석(홈)에는 요미우리와 산케이 등 보수·극우 매체가, 3루 관중석(원정)에는 아사히와 마이니치, 도쿄 등 진보 매체가 포진한 형국이다. 보수화하는 일본 사회, 그에 편승한 아베 총리의 인기 행진에 진보 매체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려다가도 숨을 골라야 하는 게 현주소다.


야구장 카메라는 대체로 그라운드를 비춘다. 그러다 결정적 순간에는 앵글을 돌려 관중의 반응을 잡는다. 기자도 그렇다. 총리 회견이 그랬듯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홈 1루가 아닌 원정 3루에서 이뤄진다. 우리는 어느 쪽 관중석에 앉아 있는 걸까. 카메라가 돌아가면 기자 역시 언제든지 ‘보여지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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