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첫 마음에 손전등을 켭니다

[이슈 인사이드 | 문화] 이서현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이서현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나이 마흔을 갓 넘긴 그는 코로나19로 텅 빈 극장 안에서 마스크 안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아이처럼 울었다고 했다. 영화가 꼭 자기 이야기 같아서란다.


조직의 부속품으로 녹슬어가기보다는 지금이라도 꿈꾸던 일을 해보자 마음먹었다. 퇴사 계획도 착실히 세웠다. 당장 호주머니 절반이라도 채울 수 있는 파트타임 자리, 들어오는 돈은 적어도 사업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수소문했다. 사직서를 던졌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회사를 떠난 지 채 넉 달이 되지 않아 코로나19가 터지기 전까지는…. 일은 곧 끊겼고 그는 갈 곳 없는 황망한 발걸음을 극장으로 옮겼다. 실직한 나이 마흔의 영화 프로듀서 김찬실의 이야기에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순정에 대한 영화다. 한 예술영화 감독 밑에서 오랜 기간 영화 프로듀서로 일한 찬실이 인생은 회식자리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감독이 급사(急死)하는 순간부터 예측불허로 전개된다. ‘영화는 원래 감독의 것’이라는 제작사 대표의 말에 대꾸도 못 하고 하루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된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보낸 편지마저 ‘그 감독 영화, 사실은 너무 재미가 없고 졸렸다’로 끝을 맺는다.


프로듀서로 오랜 기간 일하던 김초희 감독은 ‘사람들이 살면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방법은 없는가’를 고민하며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다. 갈피를 못 잡는 현실, 흔들리는 마음 속 자신이 홍콩 영화 ‘아비정전’ 속 장국영이라고 주장하는 유령이 나타난다.


“찬실씨, 찬실씨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해져요.”


유령 장국영 덕분인지, 꼬여버린 현실 덕분인지 ‘결혼은 못해도 영화는 계속 할 줄 알았다’는 찬실은 영화와 헤어진 뒤에야 영화에 대한 그의 첫 마음을 꺼내본다. 영화도 없고, 남자도 없지만 찬실이는 복도 많다. 굽이굽이 높은 계단길을 지나야 간신히 나오는 산동네 찬실이네 집까지 후배들이 모여들고 어둠이 내리자 찬실이는 후배들의 발걸음 앞으로 ‘딸깍’ 손전등을 비춘다.


코로나19로 극장이 유례없는 혼란을 겪는 요즘 2만4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 것은 찬실이의 모습에서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리라. 어쩌다 사회 생활의 첫 시작에서 벌써 이만큼이나 떠나온 이들, 극장에서 빛바랜 자신들의 첫 마음, 그 시절 그 열정을 기억해낸 사람들처럼 마음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때 품은 그 꿈은 안녕하십니까.’ 코로나19로 유례없는 재난 상황을 맞은 데다 21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연일 기사가 쏟아지는 시기다. 기자들만큼 현장에서 맨 처음 품은 그 열정과 원칙을 되새길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리고 그 열정과 원칙을 잊은 대가를 크게 치러야 하는 직업이 또 있을까. 미디어의 흐름이 소용돌이치고 참과 거짓의 경계가 흐려진 세상, 중심을 잡고 매일 원칙대로 마감을 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나는, 그리고 우리 선배 기자들은 후배들이 발을 헛딛지 않도록 그들의 앞길에 제대로 손전등을 밝히고 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명예나 요행을 바라지 않고 현장과 팩트를 믿는 기자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쓴 기사를 볼 때마다 찬실이 앞에 떠오른 보름달을 만난 듯 눈이 밝아진다. 열정과 원칙, 그 첫 마음을 잃지 않은 당신들은 참 복도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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