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보다 위험한 트럼프의 '직관주의'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이태영 텍사스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이태영 텍사스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바이러스를 1분 안에 없앤다는 소독제를 인체에 주입해 환자의 폐에 있는 바이러스를 씻어낼 방법이 없을까?”


코로나19의 치료법으로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했을 때,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이성주의자(rationalist) 에 속한다. 반면, 솔깃했거나 그럴듯하게 들렸다면 당신은 직관주의자 (intuitionist)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지난 23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정례 브리핑에서 던진 제안이다. 일각에서는 브리핑 분위기를 밝게 하고자 던진 농담일 수 있다는 반응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행보와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농담일 확률은 낮아 보인다. 지난달 한 브리핑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말라리아 치료제인 하이드록시 클로로퀸이 코로나 사태를 진정시킬 획기적인 방법(game changer)이라는 근거없는 주장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황당하다 못해 무책임한 제안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지만, 사실 그의 사고와 언행은 임기 이후 현재까지 꽤나 일관적이다. 과학적 근거나 확립된 진실보다는 스스로의 본능과 직감에 의존해 의사 결정을 내리는, 전형적인 직관주의자의 특성이다. “나는 매우 본능적인 사람이지만 나의 본능은 항상 옳다”며 사안마다 직관과 본능에 대한 확신을 끊임없이 드러내온 그는 코로나 사태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미국이 세계에서 코로나19에 가장 취약한 나라가 된 것도 “바이러스가 기적처럼 사라질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며 초기 대응을 미룬 트럼프 대통령 때문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국민의 생명이 걸린 사안에 대해 과학적 사실보다 자신의 직감을 믿는 대통령의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비판하거나 무시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제안은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달 브리핑을 들은 애리조나 지역의 한 부부가 클로로퀸 성분이 든 수조청소용 첨가제를 먹어 남편은 숨지고 부인은 중태에 빠지는 일이 발생했다. 소독제 주입을 제안한 브리핑 이후에는 표백제나 소독제를 먹고 보건 당국에 신고한 경우가 뉴욕 지역에서만 수십건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릭 올리버 시카고대 교수와 토머스 우드 오하이오 주립대 교수는 공저 ‘마법에 걸린 미국: 직관주의와 이성주의는 어떻게 미국 정치를 분열시키는가’에서 트럼프 대통령 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자들도 전문가의 지식·과학적 사실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직관주의적 성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미국정치의 분열은 진보/보수의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라 이성주의와 직관주의 세계관의 충돌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진보와 보수는 정부의 역할 등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지만 합리와 과학에 근거한 근대 이후의 세계관, 민주주의의 원칙 등 세상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관점에 있어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성주의자와 직관주의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인식, 그들이 믿는 진실마저 다르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즉, 이성주의자들에게 소독제를 권하는 트럼프는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비상식적인 대통령이지만, 직관주의들로서는 자신들이 과학보다 더 신뢰하는 대통령이 제안한 치료방법을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란 없는 것이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이성주의자와 직관주의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두 세계관의 충돌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다양성과 다름에 대한 존중을 위협하고 공동체가 공유하는 진실과 가치마저 무력하게 함으로써 팬더믹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특히 세계보건기구마저 ‘인포데믹(Infodemic)’이라고 지칭했을 만큼 허위정보의 난립이 바이러스만큼 심각한 상황에서 이를 막아야 할 지도자가 도리어 혼란에 일조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결국 미국 언론학계 교수들이 언론사에 코로나 브리핑을 생방송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연판장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금 미국에서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한 것은 트럼프의 직관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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