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도 5월 광주가 있다

[글로벌 리포트 | 인도네시아] 고찬유 한국일보 자카르타특파원

고찬유 한국일보 자카르타특파원 | 2020.05.20 17:04:25

고찬유 한국일보 자카르타특파원. 살가운 회사 후배가 자카르타 특파원 부임 전 다큐멘터리영화 한편을 소개했다. 2007년 5월 공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에서 ‘20세기 최악의 집단학살 가운데 하나’라고 밝힌, 인도네시아 1965년 대학살을 다룬 ‘액트 오브 킬링(Act of killingㆍ2012)’이다. 학살 가담자들이 당시 살인을 재연하는 내용이다. 영화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65년 (수하르토) 군부가 장악했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면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노조원, 무전 농민, 지식인, 화교가 그들이다. 1년도 지나지 않아 서방 정부들의 원조로 100만명 넘게 살해됐다. (중략) 이후 그들은 정권을 잡았고 반대 세력을 줄곧 박해했다. 그 살인자들은 우리를 만나 자신들이 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마침 1965년 대학살을 압축하는 자막과 충격의 연속인 영화 내용을 곱씹을수록 1980년 5월 광주가 떠올랐다. 후속편인 ‘침묵의 시선(The Look of Silence)’, 역사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배동선 저)’를 챙겨본 뒤 지난해 3월 현지에 부임했다. 인도네시아에선 금기어로 통하는 1965년 대학살을 다룬 현지 기사는 많지 않았고 취재도 쉽지 않았다. ‘액트 오브 킬링’은 인도네시아에서 개봉 일주일 만에 상영 금지됐다고 했다. 학살 관련자들은 여전히 권력의 실세다.


전년 10월25일 ‘액트 오브 킬링’의 주인공 안와르 콩고(78)의 부고를 국내에 알렸다. “나쁜 일인 줄 알았지만 내 양심이 그 사람들을 죽이라고 했다”고 말하며 구토하는 장면이 영화의 끝을 장식하지만 그는 생전에 학살을 사과하지 않았다. ‘공산당 학살자’라는 별칭을 평생 자랑스러워했고 국민영웅 대접을 받았다. 학살의 최고 책임자이자 32년간 철권 통치한 수하르토 역시 한마디 사과 없이 2008년 1월27일 숨졌다.


두려움을 떨친 학살의 생존자들은 그들의 무책임한 죽음을 뒤로 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난해 5월 광주인권상 특별상 수상을 기념해 인도네시아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공연한 디알리타 합창단은 어눌한 목소리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광주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연대의 표시라고 했다. 피해 여성들로 꾸려진 합창단은 학살 당시 가족을 잃고, 성희롱과 강간을 당하고, 불법 구금과 고문에 시달리고, 이후 ‘빨갱이’라 손가락질 당한 신산의 세월을 딛고 2011년부터 가사와 운율에 적의와 증오, 탄식 대신 화해와 치유, 희망을 담았다.


환란처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현지에 번지던 3월24일 만난 브조(또는 벳조) 운퉁(72) 1965대학살연구소(YPKP1965) 소장은 올해 광주인권상 수상자다. 그는 수카르노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쫓겨 다니다 9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린 뒤에도 정치범 딱지가 붙어 감시당했다. 1999년 연구소를 만들어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학살 매장지 365곳을 발굴하고, 2015년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시민법정에 증인으로 나서 1965년 대학살을 ‘학살’ 범죄로 인정받았다. 과거사 정리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대학살 생존자들을 초청해 증언을 듣고 국가인권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식 사과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처신 바르게 광주를 찾아가 정부를 대신해 희생자와 유족에게 머리 숙여 사과한 문재인 대통령을 존경하고, 그런 광주가 부럽다. ‘수많은 시민이 총칼에 희생됐는데 침묵한 게 아니라 그 희생을 딛고 민주화 성지로 거듭난 광주를 배우자’고 대학살 생존자들에게 말한다. 광주는 인도네시아의 표본이다.” 마스크를 끼고 3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뒤에도 지치지 않고 쇼핑몰 등으로 변한 강제노역 현장에 인도한 브조 소장은 “사라져 가는 역사의 현장에 기념비라도 세우고 싶다”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단연 인도네시아는 민주화의 여정에서 동병상련의 나라다. 광주인권상 최다 수상 국가이기도 하다. 광주의 진실을 부정하고 책임을 외면하는 목소리가 여전한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긴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연대와 배움을 바란다. 인도네시아는 10년만에 꽃을 피우는 ‘아모르포팔루스 티타눔(일명 시체꽃)’의 원산지다. 늦게 피는 꽃은 있어도 피지 않는 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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