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이 지난 18일 40주년을 맞았다. 사람으로 치면 불혹의 나이다. 40년 전, 광주 시민들은 불의한 국가권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숭고한 항거와 희생정신은 씨앗이 되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 땅에 민주화를 뿌리내리게 했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5·18의 완전한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1988년 국회 청문회 등 9차례나 진상조사가 이뤄졌지만 여전히 많은 의혹이 풀리지 않았고, 아직까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자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혹자는 그 책임이 언론에도 있다고 한다. 40년 전 언론이 당시의 참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자협회보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의 언론 통제에 기자들 사이에선 검열 철폐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한국기자협회는 이를 결집시키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5월16일엔 검열 전면 거부를 결의, 20일 자정부터 모든 신문과 방송, 통신은 계엄사의 검열을 거부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제작 거부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기자협회의 검열거부 결의 다음날인 5월17일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대거 연행했다. 여기엔 기자협회 집행부도 포함돼 고영재·정교용·이수언·이홍기 부회장과 박정삼 감사, 김동선 기자협회보 편집실장, 안양노 기자협회보 기자 등 7명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이 중 5명이 구속됐다, 피신해 있던 김태홍 회장도 80년 8월27일 전남 강진의 한 농가에서 체포됐고, 노향기 부회장은 6월28일 견디다 못해 자수했다. 기자협회보도 1년 2개월 동안 폐간됐다.
1981년 7월10일에야 복간한 기자협회보는 당시 3면에 1980년 5월부터 1981년 5월까지 일어났던 언론 관계 일지를 간략하게 기록했다. 1980년 5월17일 기자협회 회장단과 감사, 편집실 직원 등 7명이 비상계엄 확대선포 직후 포고령 등 위반혐의로 연행돼 조사를 받았던 사실부터 그해 6월2일 ‘광주사태’로 휴간했던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이 14일 만에 다시 발행됐다는 내용 등을 실었다. 1980년 7월31일 정부가 사회정화, 발행실적 미달을 이유로 기자협회를 비롯한 주간, 일간, 계간지 등 정기간행물 172종의 등록을 취소한 것, 또 같은 해 11월14일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각각 임시총회를 열고 신문구조 개편과 방송공영화 등을 결의한 것도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는 5공화국의 언론 통제와 관리가 철저한 때였다. 이후로도 한동안 기자협회보를 비롯한 대다수의 언론이 5·18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오히려 5월의 진상은 대학가와 재야에서 널리 알려졌고, 이후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 투쟁으로 연결된다. 최근 들어 일부 언론에선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며 다양한 방식으로 사죄를 표하고 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