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항쟁의 성과물로 창간된 신문에 입사한 공채 1기는 한겨레 23명, 국민 15명, 세계 33명, 문화 12명. 이들 기자들은 당시 수백에서 수천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신문사에 입사했다. 신문마다 태생적 차이가 있지만 1기들은 오랫동안 군사정권에 억눌린 국민이 언론의 자유를 갈망한 시기에 기자생활을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가슴 밑바닥에는 뭔가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언론엔 발행의 자유가 주어졌다. 이듬해 5월 한겨레를 시작으로 국민일보, 세계일보, 문화일보가 창간되면서 뜻 있는 젊은이들이 대거 언론계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기자협회보는 다시 이들을 주목했다. 2008년 6월4일자 기자협회보 1면 머리기사와 4면 전면에 ‘공채 1기 20년’ 기획기사가 실렸다. 기자협회보는 “이들은 지난 20년간 한국 신문과 영욕의 세월을 함께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공채 1기들의 삶을 통해 한국 신문의 굴곡진 역사를 되짚었다”고 했다.
공채 1기 기자들은 초년병 시절 5공 청문회, 3당 합당, 대통령 선거, 문민정부 출범 등 급변하는 정치·경제적 상황을 목격했다. 기자 일이 익숙해질 무렵엔 신문사 간 치열한 증면 경쟁 속에 놓였고, 그런 와중에 1997년 IMF 외환위기에 직면했다. 기자협회보는 “외환위기는 온 나라를 흔들었고 신문사도 예외는 아니었다”며 “신문들은 언제 증면 경쟁을 벌었냐는 듯 앞다퉈 감면을 했고 감봉, 감원 등 구조조정의 유령이 신문사 주위를 배회했다”고 설명했다.
경영 환경 악화는 신문사 내부의 시련으로 이어졌다. 기자협회보 보도에 따르면 1998년 세계일보 기자들은 경영진의 경영 횡포와 편집권 전횡에 반기를 들고 94일간 파업과 철야 농성을 벌였다. 경영 위기로 워크아웃 직전까지 간 한겨레는 2004년 11월 기자 40여명을 떠나보냈다. 문화일보는 현대그룹에서 분리됐고, 국민일보는 조희준 회장 퇴진과 맞물려 내부적으로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기자협회보는 공채 1기에 대해 ‘지사형 기자’를 꿈꾸며 언론사에 입문했지만 이들만큼 부침을 거듭한 세대가 드물며, 이들의 이미지가 개혁, 사명감, 희생 등으로 점철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기자협회보는 “특종을 좇아 취재 현장을 누비고, 정신없이 기사를 써대고, 동료들과 경쟁하며 보내면서 기자로서 자긍심을 가졌지만 한편으론 구조조정과 명예퇴직 등의 이름으로 좌절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기자협회보는 “입사 20년에 접어든 이들은 부장, 논설위원, 선임기자 등 각 신문사를 대표하는 기자로 성장했다”며 “기자로서 초심을 굳건히 유지하며 좋은 신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