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과 분노, 자조와 자괴가 몰아치는 날이 7월 내리 계속되고 있다. 전자는 2020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30대 여성으로서, 후자는 기자로서 느끼는 감정의 거스러미들이다.
지난 6일, 사법부는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하며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얄팍한 이해도를 드러냈다. 같은 날 근조 화환이 도열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상 빈소에선, 성범죄로 복역 중인 그를 ‘민주투사’에 빗대는 어느 정치인의 몰지각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지난 10일 새벽엔 박원순 서울시장이 성추행 피소를 인지한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성희롱을 처음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고 온 이의 삶이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인간적인 사과’를 원했다던 피해자의 존재는, 그의 마지막 길에서 지워져버렸다.
이런 일들이 숨 돌릴 새조차 없이 발생하면, 보도하는 입장에서도 잔뜩 날이 설 수밖에 없다. 혹자는 여성 기자의 ‘성인지 감수성’이 남성에 견줘 절로 타고나는 것 마냥 생각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성폭력과 성차별을 온몸으로 감지하는 감각의 촉수는 분명 남성보다 더 많겠으나, 이를 공적인 언어로 옮기는 일은 부단한 훈련이 뒤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단어를 잘못 택한 건 아닌지, 맥락을 오독할 여지는 없는지, 사진이 또 다른 피해를 야기할 가능성은 없는지 스스로에게 수십 번씩 되물어도 늘 자신은 없다. 특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성범죄를 다룰 땐 더욱 그렇다.
손정우의 재판이 진행될 때, 이 날선 오지랖이 발동해 타사 후배를 나무란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가 재판정에서 눈물을 쏟으며 호소했다는 제목으로, 손씨와 변호인의 주장, 그 가족의 눈물만을 담아 작성한 기사를 보고서다. 나는 그에게 “가해자에게 감정 이입하지 말라”며 쏘아붙였다.
이 오지랖은 얼마 안 가 부끄러움으로 되돌아왔다. 지난 13일자 한겨레에 실린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칼럼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오랜 벗” 박 시장을 절절하게 추모하고,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인물”이라며 기렸다. 권수현 여성학자는 이를 두고 “교육환경에 대한 보호책임이 있는 교육감이, 학교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교장·교감·교사가 성희롱을 하면 그들의 편에 설 수 있다는 메시지”이며 “한겨레는 그 글에 지면을 할당함으로써 이 거대한 폭력에 가담했다”고 비판했다. 나는 독자들로부터 “어떻게 그런 글이 실릴 수 있냐”는 항의도 함께 받았다.
한겨레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이 칼럼이 게재된 점에 부끄러움과 참담함을 함께 느낀다. 사후에나마 칼럼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전에 이를 방지하거나 더 적극적인 후속조치를 요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회를 곱씹는다. 촉수를 더 예민하게 세우지 못했던 점도 반성한다. 이것이 한겨레를 대표하는 의견이 될 순 없겠으나,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한 점을 나는 이 지면을 빌려 사과드린다.
언론의 책무는 ‘옳고 그름’의 경계를 ‘네 편, 내 편’의 잣대로 휘젓지 않는 것이다. 권력을 보위하지 않고 대신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견해의 차이’와 ‘문제의 시비’를 구분하는 것이다. ‘현재’를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걸, 올여름 나는 다시금 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