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어넌과 언론의 딜레마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이태영 텍사스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이태영 텍사스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2016년 12월, 에드가 웰치라는 20대 남성이 워싱턴 DC의 한 피자가게에 소총을 난사했다. 소셜미디어에서 유통되던 가짜뉴스(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 인사들이 이 식당 지하에서 아동성매매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 음모론)를 ‘자체조사’하겠다는 명분이었다. 아동성매매 조직은 물론, 그 식당에는 지하실 자체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 사건은 가짜뉴스의 폐해를 보여준 사례로 국내에도 알려졌다. 이른바 ‘피자게이트’다.


하지만 이 사건은 가짜뉴스에 속은 20대의 치기어린 실수가 아니었다. 미국 내 극우 음모론자 집단인 ‘큐어넌 (QAnon)’의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큐어넌은 미국 에너지부의 최고 기밀등급인 ‘큐(Q)’와 익명을 뜻하는 ‘어나니머스(Anonymous)’의 합성어다. 2017년 경부터 온라인 게시판 ‘포챈(4Chan)’에서 ‘Q’라는 닉네임이 퍼뜨리는 친트럼프·반민주당 성향의 음모론을 익명의 지지자들이 확대·재생산하면서 존재를 알렸다. 하지만 고위 전략가를 자칭한 ‘FBIAnon’ 등 큐어넌의 전신들은 이미 2016년부터 포챈에서 유사한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큐어넌의 음모론은 다양하지만 핵심 논리는 간단하다. 제도 밖 숨은 권력집단을 의미하는 ‘딥스테이트 (deep state)’가 트럼프 정부를 무력화하려는 음모를 벌이고 있고, 트럼프 정부는 이들을 처단하기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클린턴 전 장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 정치인은 물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헐리우드 인사 등 민주당 관계자 혹은 지지자들을 딥스테이트로 본다. 큐어넌은 딥스테이트가 권력집단을 넘어 아동성매매·학살을 일삼고 악마를 숭배한다고 믿는다.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리, 혹은 인터넷의 음습한 곳에서 유통되는 망상쯤으로 들리는 이들의 음모론이 최근 미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이들의 존재는 수차례 언론에 보도된 적 있다. 2018년 6월, 무장한 큐어넌 지지자가 장갑차를 몰고 후버댐 인근에서 클린턴 전 장관의 이메일 사건에 대한 숨겨진 법무부 보고서를 공개하라고 주장한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딥스테이트의 유력 인사라 믿고 범죄조직의 두목을 살해한 큐어넌 지지자도 있었다.


이 때만 해도 망상에 빠진 이들의 일탈쯤으로 여기던 언론의 태도가 바뀐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팬데믹으로 인해 온라인 소통이 늘면서 큐어넌의 음모론도 덩달아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 영향력이 급증한 탓이다. NBC에 따르면, 큐어넌 지지자가 페이스북에만 수백만명에 이르며, 월스트리트저널은 페이스북의 큐어넌 커뮤니티 회원수가 지난 3월 대비 6배 급증한 4만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피자게이트’ 관련 댓글이나 공유가 2016년 당시보다 더 많다는 뉴욕타임스의 분석도 나왔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큐어넌 관련 계정을 잇따라 폐쇄한 것도 같은 이유다.


더 큰 이유는 이들이 현실정치에까지 세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최근 큐어넌 지지자인 마조리 테일러 그린이 조지아주 하원후보가 되면서 언론들은 앞다투어 큐어넌이 주류(mainstream) 보수 세력이 될 가능성을 다뤘다. 뉴욕타임스는 이들을 오바마 정부 당시 비주류였던 ‘티파티’가 결국 공화당 주류에 편입된 것에 비유하며 우려를 제기했다.


문제는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보도가 자칫 대중들에게 큐어넌의 존재와 음모론을 널리 알리는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의 보도에 있어 언론이 고민해야 하는 딜레마다. 반복적 노출은 익숙함을 가져오고, 익숙함은 거짓마저 진실로 믿게 할 위력이 있다는 사실 또한 연구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큐어넌의 음모론 보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2월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76%는 큐어넌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고 답했다. 지금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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