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편집국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이 언론계의 주목을 받았다. 강진구 경향신문 기자가 지난달 29일 온라인으로 쓴 ‘박재동 화백에 대한 가짜 미투 의혹’ 기사와 지난 6일 서울신문 지면에 게재된 곽병찬 논설고문의 ‘광기, 미투를 조롱에 가두고 있다’는 칼럼이 갈등의 시작점이다. 두 기사는 모두 성범죄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는 표현이 많고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한 편집국 보도 방침과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부의 비판에 직면했다.
성범죄 등 성과 관련된 사건을 선정적으로 재현해 피해자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언론이 저지르는 대표적인 2차 가해다. 가십이나 기이한 의혹으로 점철된 기사도 마찬가지다. 그런 측면에서 논란이 된 두 기사는 표현과 내용 모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두 기자는 모두 오랜 경력을 갖추고 기존 보도의 영역에서는 나름 수완을 발휘했지만, 오늘날의 ‘젠더 감수성’을 읽어내고 표현하는 데는 서툴렀다. 그렇기에 편집국 구성원들마저 읽기 불편한 글이 나왔다. 내부 구성원의 지지조차 받지 못한 기사가 독자를 설득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모든 원인을 개인의 일탈로 돌린다면 절반의 해결에 그칠 수 있다. 대부분 편집국이 비슷한 종류의 크고 작은 갈등에 직면해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본질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서울신문의 사례는 게이트키핑의 실수라기보다는 숙의를 거친 결론에 가까웠다.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실장은 7일 해당 칼럼이 게재된 경위를 설명하며 “곽병찬 칼럼은 개인적으로 조금도 동조하지 않지만 위태로운 범위 내에서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기명 칼럼이나 외부 필자의 칼럼에서 사실관계의 오류를 걸러내는 수준을 벗어나 과도하게 게이트키핑을 적용하는 것은 ‘검열’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니까 ‘표현의 자유’ 혹은 ‘지적 다양성의 포용’이라는 가치에 좀 더 중점을 두고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 분명하다. 이번처럼 표현의 자유와 피해자에 대한 보도 윤리가 충돌하는 경우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에서 일종의 ‘세대 갈등’이 감지된 점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성별·세대별로 공유하는 젠더 감수성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일례로 기자협회가 창립 56주년을 맞아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현재 근무하는 언론사의 성인지 감수성이 어떠하냐’고 묻자 5년차 기자 41%는 ‘낮다’고 응답했고 21년차 이상 기자들은 오히려 52%가 ‘높다’고 답했다. 이는 개인 인식이 바뀌는 속도의 차이일 수도 있고 경험의 다름에서 비롯한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비슷한 사안을 해석하며 선배는 후배 기자들이 예민하다고 생각하고, 후배들은 선배 기자들이 무감각하다고 여기는 일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전가의 보도가 아니고, 생각의 차이가 부적절한 의견에 면죄부를 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의 젠더 보도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서로 간의 생각 차를 줄이려는 노력은 필요해 보인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할 것이다. 예컨대 혐오 표현을 하지 말자는 침묵의 합의를 넘어 무엇이 혐오인지, 말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의 경계는 어떻게 세울 것인지 등을 더 자주 더 치열하게 토론했으면 한다. 기자 개개인도 더 나아간 젠더 의식을 갖추기 위해 더 노력하길 바란다. 나만 옳다는 확신보다는 틀릴 수도 있다는 성찰의 태도를 갖춰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