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추정 원칙의 남용

[이슈 인사이드 | 법조] 임찬종 SBS 법조팀 기자

임찬종 SBS 법조팀 기자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을 계기로 무죄추정의 원칙이 다시 논란이 됐다.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유죄라고 판정된 자만이 범죄인이라 불려야 하며, 단지 피의자나 피고인이 된 것만으로는 범죄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원칙”(국가인권위원회 인권 용어사전)을 언론이 위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제기한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원순 전 시장의 행위도 재판을 통해 확정된 바가 없는 만큼 언론이 가치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2016년 12월로 돌아가 보자.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기는커녕 기소조차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언론의 의혹제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 나름의 가치판단을 내렸고, 그 결과 수십만 명이 넘은 사람이 광장에 나와 촛불을 밝혔으며, 국회는 마침내 대통령을 탄핵소추했다. 만약 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되어야 하는 만큼 언론도 가치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당시의 보도는 원칙을 완벽하게 위배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촛불집회의 계기가 된 보도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행위에 의혹을 제기한 기사도 모두 무죄추정의 원칙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무죄추정 원칙은 형사절차에서 적용되는 원칙일 뿐, 언론보도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자백이나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어야만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고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도 시점에서 수집할 수 있는 최선의 정보에 근거해 공적인 인물에 대한 합리적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언론의 의무에 가깝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 사건이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에서 그러했듯이 말이다.


과거와 달리 언론 보도와 관련해 무죄추정의 원칙이 종종 소환되는 것은 당황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상대 편’에 대해서는 약간의 오류가 있더라도 합리적 추정에 근거한 의혹 제기가 보장되어야 한다며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우리 편’에 대해서는 합리적 의심을 모두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면 무죄로 추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울 때는 배경과 동기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형사절차에서 피고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근대 사회가 다듬어왔던 원칙을 언론보도를 억누르고 여론 형성을 저해하기 위해 진영논리에 따라 남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언론은 공인의 행위에 대해 무죄로 추정할 수도, 유죄로 추정할 수도 있다. 사건과 관계된 인물들 주장의 신빙성, 의혹 제기에 대한 당사자의 반응, 언론이 취재한 관련 정보 등 여러 사실관계를 종합한 뒤 가치판단을 내리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언론의 당연한 기능이다. 다만 정보의 정확성과 논리의 정당성을 합리적 상식의 기준으로 평가받을 뿐이다.


형사절차의 원칙이 언론보도의 기준으로 확장되고, 형사재판에서의 유무죄 판결이 보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잣대로 여겨지는 현상은 정상적 취재와 보도 행위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 만약 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언론이 가치판단을 드러내서는 안 되고, 형사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될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면 의혹을 제기해선 안 되는 사회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확실한 것은, 그런 사회에서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임기를 모두 채웠을 것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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