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불신의 시대를 끝내야 합니다

지령 2000호 맞아 회원들께 드리는 편지

김동훈 한국기자협회 회장. 기자협회보가 오늘 지령 2000호를 맞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비평지로 1964년 11월10일 창간호를 발행한지 55년 10개월여 만입니다.


기자협회보는 1964년 8월17일 한국기자협회가 창립한지 석 달 만에 탄생했고, 창간 35년 만인 1999년 5월, 지령 1000호를 발행했습니다. 그 후 21년 만에 감격적인 지령 2000호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월간지로 시작해 1968년 8월 지령 40호 만에 ‘언론전문지 주간시대’를 열었지만 박정희 정권의 사전 검열과 비상계엄 등으로 1973년 다시 월간으로 강제 환원됐다가 1988년 5월부터 주간으로 정착됐습니다.


기자협회보의 영욕은 시대의 아픔과 궤를 같이 합니다. 1975년 3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전국 일선 기자들의 언론자유 수호운동을 적극 지지하다가 9개월간 강제 폐간됐고, 1980년 5월에는 전두환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협회 회장단과 편집국 기자들이 수배, 연행, 구속됐고, 그 해 7월 두 번째 강제 폐간돼 1년이나 발행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기자협회의 얼굴’이자 ‘신문의 신문’입니다. 서슬퍼런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당시 잠시 위축되긴 했지만 언론 본연의 비판과 감시 기능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등 언론자유를 침해하려는 그 어떤 외부 세력을 성역 없이 비판해왔고,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사주와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켜켜이 쌓아올린 계단 2000개의 무게감 앞에서 기쁨보다는 착잡함이 앞섭니다. 우리는 지금 언론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언론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기자들의 자부심은 바닥까지 내려앉았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산하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올해 발표한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은 22%로 조사 대상 38개국 가운데 꼴찌였습니다. 그것도 4년 연속 최하위입니다. 지난달 기자협회의 회원 대상 설문조사에서 기자 72.2%가 국민들이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가 어디냐는 질문에는 기자 넷 중 한 명(24.8%)이 ‘잘 모름·무응답’을 택했습니다. 우리 스스로 신뢰하는 언론사를 찾기 힘든 세상이 됐습니다. 언론 불신의 원인은 난무하는 가짜 뉴스(47%)와 정파적 보도(46.2%) 때문입니다.


기자들은 협찬성 기사와 광고성 기사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여파로 무급휴직과 임금삭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자 직업 만족도는 3년 연속 하락했고, 급기야 올해는 50% 아래(46.4%)로 내려앉았습니다. 특히 1~2년 사이에 사기가 저하됐다는 응답이 91%였습니다.


국민들은 요즘 언론을 받아쓰기에 급급한 ‘랩독’이나 감시를 포기하고 눈감아 버리는 ‘슬리핑독’으로 평가하는 듯합니다. 심지어 언론 스스로 권력화한 ‘가드독’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습니다. ‘언론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 없는 언론을 택하겠다’는 토마스 제퍼슨의 말처럼 언론은 권력을 감시·비판하는 ‘워치독’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부도, 기업도, 국민도 건강해 집니다.


해답은 개혁입니다. 얼마 전 ‘개혁이 가장 시급한 기관’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1위가 검찰, 2위가 국회, 3위가 언론이었습니다. 검찰개혁은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 가능하고, 정치개혁은 국민들이 표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개혁은 언론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국민들이 일일이 ‘가짜뉴스’나 ‘정파적 보도’를 판단하고 걸러내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자협회보 지령 2000호를 계기로 기자협회는 언론개혁을 열망하는 1만여 기자 회원들의 목소리와 시대적 소명을 충실히 담아낼 것입니다.


제47대 한국기자협회 회장 김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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