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8월17일 한국기자협회 창립 3개월 후인 11월10일 창간한 기자협회보가 오늘 2000번째 신문을 발행했다. 기자협회보가 56년 동안 부침과 영욕을 겪으며 한국언론의 살아있는 역사를 기록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정의롭고 용기 있는 일선 기자들 덕분이었다. 기자협회보는 반세기 넘게 기자사회 대화의 광장이자 좋은 저널리즘의 공론장, 미디어산업의 흐름을 통찰하는 마당이었다.
지금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지만 군사정권 시절의 언론 환경은 참담했다. 언론은 할 말을 하지 못했고, 기자는 기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권력에 불리한 기사는 검열에 걸려 삭제되고, 협박과 회유가 공공연하게, 은밀히 나돌고, 침묵을 깨려는 기자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질식할 것 같은 폭력의 시대, 숨이라도 제대로 쉬고 싶었을까. 이심전심 뜻맞는 기자들끼리 자유언론에 대한 열망을 얘기하며 무력감을 떨쳐내려 했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는 공감에 밤늦게 모임을 갖고 성명서 문안을 다듬고 집단행동을 결행했을 때 기자협회보는 기꺼이 대변지가 됐다. 기자협회보는 자유언론에 대한 열망을 알렸고, 기자들은 기자협회보에 실린 기사를 돌려 보며 싸움의 힘을 얻었다.
좋은 언론을 하고 싶었던 기자들의 버팀목이던 기자협회보를 권력이 그냥 둘리 만무했다. 1973년에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폐합을 비판한 리영희 교수의 기고로 주간이던 기자협회보는 월간 발행을 강제당했다. 1975년 3월 조선일보 기자 5명이 추가로 파면된 사건을 다룬 1면짜리 ‘증면호’를 내자 폐간시켰다. 기자협회보가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의 교량 역할을 하고 언론통제 실상을 고발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폐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았지만 신군부는 계엄령을 내리고 언론에 검열의 족쇄를 채웠다. 평기자 중심으로 언론검열 철폐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기자협회는 이런 움직임을 결집해 비상계엄 해제, 사전검열 철폐운동을 펼쳤다. 5월17일 확대 계엄선포의 소용돌이에 회장단과 편집실 기자들이 집단 구속됐고 그 와중에 기자협회보는 두 번째 폐간당했다.
풍비박산이 된 기자협회가 조직을 재건하고 기자협회보도 복간했으나 야만의 5공화국 체제에서 기자협회보의 필봉은 굴절됐다. 언론사 강제 통폐합, 언론인 구속과 대량 강제해직에 눈감고 ‘땡전뉴스’로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는 언론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기협 강령 제2항 ‘우리는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여하한 압제에도 뭉쳐싸운다’라는 조항은 ‘우리는 언론창달과 윤리제고에 앞장선다’로 바뀌었고, 기자협회보의 사설 격인 ‘우리의주장’도 지면에서 사라졌다.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언론인 자질향상, 언론자유 수호, 언론인 권익 옹호, 평화통일, 국제교류 등 5대 강령에는 기자협회보의 존재 이유가 모두 담겨 있다. 지금까지 5대 강령에 소명하고자 노력했지만 온전히 다해왔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기자 생활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기자로서의 보람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면서 회의감이 무섭게 번지고 있다. 사실 추구는 정파성에 빠져 누더기가 되고, 디지털 전환은 페이지뷰에 매몰돼 독자와 멀어지고 있다. 복잡하고 중층적인 문제를 해석할 실력은 밑천을 드러냈고, 치열함마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언론을 둘러싼 환경에 문제의 원인을 돌려선 안 된다. 언론의 일그러진 모습을 마주할수록 암담하지만 체념해서도 안 된다. 지금의 취재 보도 방식이 급변하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면 점검하고 혁신해야 한다. 다시 기자정신을 가다듬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