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회복, 구체적이고 투명한 준칙서 시작하자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만약 세상이 완벽하다면, BBC의 편집 가이드라인은 단 한 문장으로 구성될 것이다. 최상의 판단을 내려 알아서 하라!”


2010년 당시 마크 톰슨 BBC 사장이 편집 가이드라인 서문에 쓴 내용이다. 당연하지만 세상은 완벽하지 않고 언론도 완벽하지 않다. 능숙한 기자라도 수많은 사실의 조각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노련한 기자들도 때로는 악의를 품은 제보자의 말에 속아 넘어간다. BBC는 기자들이 윤리적 위험에 빠지거나 오보의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편집 가이드라인’이라는 난간을 만들었다.


한국 언론도 나름의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다. 한국기자협회와 신문협회 등이 신문윤리강령을 제정한 게 1957년이니 60년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2014년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재난보도준칙이 만들어졌고 지난봄엔 감염병보도준칙이 제정됐다. 이외에도 자살보도윤리강령, 인권보도준칙, 성폭력범죄보도권고기준, 선거여론조사보도준칙 등 다양한 준칙과 강령이 존재한다.


이런 준칙과 강령은 각 언론사별로도 제정되어 있다. KBS는 1998년 국내 방송사 최초로 방송제작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지난달 4차 개정판을 내놨다. 한겨레신문은 지난해 ‘조국 사태’를 계기로 2007년 제정한 취재보도준칙을 전면 개정해 지난 5월 공개했다. 모두 정확성, 공정성, 신뢰성 등 언론의 기본 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언론 신뢰도는 낮은 수준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준칙과 가이드라인이 낡은 취재보도 관행을 충분히 견제하지 못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신라젠 사건 취재 과정에서의 취재윤리 위반(채널A), 이른바 ‘검언유착’ 의혹에 대한 단정적 보도(KBS) 등은 모두 준칙과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거나 작동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BBC의 편집 가이드라인을 통해 배울 점이 몇 가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구체성이다. 예컨대 이렇다. “논쟁적 주장을 하는 익명의 단일 출처에 의존하거나 중요 출연자에게 익명성을 부여하려는 제안은 편집 정책 팀장 및 법률 자문 부서와 상의해야 한다.” (3조 3항 18호) “정치인에 대한 프로그램 출연 제안은 최고 정치 고문에게 상의해야 한다.” (4조 3항 24호) “비밀 녹음 또는 녹화는 각 부서의 상급 편집 책임자의 승인에 앞서 편집정책 책임자에게 상의해야 한다. 승인 과정의 기록은 유지되어야 한다.” (7조 3항 12호) 가이드라인이 단지 선언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취재 행위의 목적과 정당성, 유의사항 등과 함께 누구와 상의하고 어느 단계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지까지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투명성이다. BBC는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언제든 편집 가이드라인을 볼 수 있도록 공개했다. 기자뿐 아니라 제보자와 취재 대상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는 가이드라인이 실질적인 행위규범으로 기능하게 하는 강력한 추동력이다.


그동안 언론사들의 취재보도 준칙은 ‘도덕적 구호의 나열’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아무리 멋진 준칙과 가이드라인을 만든다 해도 복잡하고 치열한 취재 현장의 난간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때때로 부딪히는 윤리적 딜레마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취재와 제작 단계별로 책임 구조를 명확히 하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기자들도 선배들이 쌓아온 경험과 상식, 가치가 축약된 가이드라인을 내면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민들이 납득할만한 취재보도 윤리의 기본을 세우지 못한다면 신뢰 회복도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