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유감 시대다. 기자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회악의 평가를 받는 일이 부지기수다. 특히, 검찰 개혁 국면에서 일부 검찰 기자단 역시 적폐로 낙인 찍혔고, 급기야 ‘검레기’라는 신조어도 탄생했다. 케케묵은 출입처 받아쓰기라는 지적을 넘어 출입처와의 유착 문제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논란의 도마 위에 다시 출입처 제도가 올랐다.
최근 언론 환경이 급격히 변하며 출입처 제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당장 언론사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각 기관의 보안 의식도 철저해져 이른바 ‘마와리’를 통한 정보 수집도 예전같지 않다. 기자단 투표로 신규 언론의 출입 여부를 정하는 폐쇄성도 여전한 문제다. 출입처 제도에 대한 내부 자성이 터져나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할 지경이다.
최근 한 연구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나라 언론의 출입처 기사 비중은 유독 높다. 효율성 때문일 것이다. 출입처 제도 아래에선 적은 인력으로 그럴듯한 기사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BBC나 CNN, NHK처럼 수천 명의 기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탐사보도를 할 수 있는 언론사가 우리나라엔 없다. 한 아이템을 위해 며칠씩 취재를 해야 하는, 그러면서도 보장되지 않는 아이템을 발제할 수 있는 기자가 몇이나 될 것이며 그런 발제를 받아줄 데스크는 몇이나 될까. 모든 기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취재를 한다면 신문발행이나 뉴스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적은 인력으로 기사를 채우려다보니 출입처에서 나오는 보도자료나 일정, 정쟁 기사같은 아이템이 선호된다. 수많은 언론사들이 천편일률적인 기사를 소위 ‘찍어내는’ 근본적 이유다. 또 시청자들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언론사 입장에서는 출입처 정보를 포기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1~2년에 한 번씩 취재 분야를 바꿔야 하는 기자들이 각 분야의 전문 유튜버, 누리꾼들보다 그나마 정보 우위에 있을 수 있는 방식이 출입처 취재뿐이다. 허허벌판에서 시민이나 전문가, 누리꾼들의 말만 담은 기사들이 얼마나 정확하고 깊은 정보를 담보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도 없다.
새로운 시도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각 언론사별로 전문기자를 키웠다. 국회의 각 정당 출입 기자를 줄이는 대신 상임위나 정책 위주의 취재를 확대하기도 했고, 각 언론사별로 탐사보도나 데이터저널리즘을 강화하거나 법조출입 중 법원 취재 비중을 늘리기도 했다. 물론 의미 있는 성과도 있었지만 언론계의 주류 취재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PD수첩’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 ‘스트레이트’, ‘시사인’ 등의 출입처 없는 아이템들 역시 큰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기성 언론의 취재 소스나 기사를 바탕으로 하거나, 추가 인력과 시간을 투자한 결과물이지 오롯이 출입처를 버려둔 성과라고 보기엔 어렵다.
기자(記者)란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직업적 책무를 다했다 하여 사회적 책무마저 다했다 자위할 순 없다. 기록한다고 무조건 받아쓰기로 비판받아야 할 일은 아니지만 받아쓰기만 하다 자칫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건 굳이 수많은 역사적 사례까지 꺼내놓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출입처 제도에 대한 언론계 내·외부의 건강한 고민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출입처에 갈 기자들을 어디든 내보내기만 한다고 해결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환경은 그대로 둔 채 아랫돌 빼어 윗돌 괴는 방식으로 현장에서 뚝딱 해결해내라는 식으로는 아무 것도 풀어낼 수 없다. 언론 생태계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부터 다시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