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과 정치적 냉소주의

[언론 다시보기] 김민하 시사평론가

김민하 시사평론가 정신없이 살다보니 교수들이 꼽은 올해의 사자성어가 뉴스가 되는 때가 어느새 또 왔다. 교수신문이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꼽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한다. 들어본 일 없는 말인데, ‘내로남불’을 한자식 표현으로 옮긴 신조어라는 해설이다. 신조어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니, ‘내로남불’이란 말을 교수들도 어지간히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로남불’은 익숙하다. 권력이나 정치인의 이중잣대를 꼬집을 때 흔히 꺼내드는 개념이다. 특히 개혁 등 대의를 내세우는 정치에 대한 일침으로 많이 활용된다. 개혁을 말하며 남들에게 올바로 살 것을 강요하던 사람들이 실제 자기 삶에 있어서는 사익추구로 일관하더라는 서사이다.


보수언론은 이 정권 초기부터 이 개념을 활용한 비판을 즐겨 해왔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건 이후로는 ‘내로남불’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지난 10월 낸 책에서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사례를 일일이 정리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굳이 지적할 것도 없이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었기 때문”이라고 쓰기까지 했다.


어떻게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일 수 있을까? 이 정권 사람들이 특별히 파렴치한 사람들로 구성돼있다는 주장은 어떤 문제를 ‘내로남불’로 규정하는 게 그만큼 쉽다는 얘기도 된다. 가령 ‘반미를 주장하면서 코카콜라를 마시더라’라는 운동권의 클리셰에서 ‘코카콜라’의 자리에 대신 넣을 수 있는 것은 나이키 신발부터 애플사의 아이폰까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마찬가지로 드러난 사실 몇 가지를 조합하면 어떤 정치를 ‘내로남불’로 규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게 ‘메시지’를 반박하는 게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남용된다는 것이다. 이건 우리 공동체가 ‘메시지’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을 성실하게 다룰 기회를 잃게 한다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가령 “1가구 1주택을 말하던 고위공직자들이 실제로는 다주택자더라”는 ‘내로남불’ 비판은 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부 부동산 정책의 큰 그림과 이게 어그러지는 과정에 대한 평가를 일개인들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으로 대체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문제다. 많은 언론이 어떤 정책이나 주장을 평가할 때 “‘내로남불’이므로 틀렸다”는 논리를 손쉽게 활용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내로남불’이 반드시 ‘틀렸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내로남불’ 비판의 가장 고약한 점은 정치적 냉소주의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내로남불’의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의 일치이다. 이 세계관에서 ‘대의에 따르자’는 원칙론과 ‘욕망에 몸을 맡기자’는 현실론 중 정당화되기 쉬운 건 어느 쪽일까? 당연히 후자이다. 그렇기에 ‘내로남불’의 세계관에서 살아남는 정치는 당위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으로 귀결된다. 위선자보다 속물이 낫다는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이런 세계관의 결과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내로남불’을 개탄하는 것보다는 ‘로맨스’와 ‘불륜’의 각각을 파고들어 가는 것이 언론과 학계의 할 일이 아닐까 한다. 비판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더 잘 하자는 것이다. 글자 네 개에 시대정신을 담겠다는 시도에 너무 큰 걸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아시타비’는 그런 점에서 그저 편리한 선택이었던 게 아닌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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