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 새해 들어 처음 발행하는 기자협회보에 칼럼을 써달라는 연락을 받고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를 소재로 글을 써야겠다며 느긋하게 마음먹던 중에 김 위원장이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는 대신 자국민에게 보내는 육필 연하장만 공개했다는 ‘비보’에 낭패감을 느꼈다. 북한이 연초 8차 당대회를 앞둔 만큼 그 내용에 있어서 중복을 피하기 어려운 신년사를 생략할 수도 있으리라는 관측이 진작부터 있었지만, 막상 염두에 둔 칼럼의 소재가 사라져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오른쪽 상단을 향해 기세 좋게 뻗는 듯한, 김 위원장 특유의 필체가 담긴 연하장을 여러 번 읽어보았는데 짧은 문장에서도 새해 벽두에 천명될 북한정권의 진로와 정책 기조를 유추해볼 수 있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게재된 연하장은 여섯 문장에 불과했는데, 그중 네 문장에서 ‘인민’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전체 인민에게 축원의 인사를 삼가 드립니다’, ‘사랑하는 인민들의 귀한 안녕을 경건히 축원드립니다’, ‘인민의 이상과 염원이 꽃필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힘차게 싸울 것’, ‘위대한 인민을 받드는 충심’ 등에 ‘인민’이 등장했다.
지난해 11월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김 위원장이 집권 10년 차를 맞는 2021년에 자신의 지도이념으로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천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놨는데 연하장을 보면 그 관측이 대체로 맞아떨어질 것 같다.
아울러 새해 연하장에는 정치, 군사, 외교적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는 문구가 전혀 없다. 철저하게 북한주민을 향한 대내 메시지만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우리 국민에게 생경한 일부 표현을 빼면 여느 국가의 정상이 자국민에게 보내는 신년 인사와 크게 다른 점을 찾기도 어렵다.
노동신문의 2일자 ‘2021년의 첫 아침’ 제하의 정론에서도 ‘더욱 힘있게 비약할 조국의 내일’, ‘더 좋은 내일이 마중 오고 있다’ 등의 표현이 쓰였다.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에 주력해온 군사 국가로서 무장력을 과시하는 내용은 없었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자강력제일주의’를 내걸고 연일 자력갱생 노선을 강조하며 외부의 도움에 기대지 말 것을 주민에게 설파하고 있는데, 연하장과 노동신문 정론을 보면 그런 기조가 2021년에도 이어질 것이 확실시된다.
북한이 자력부강과 내치에 집중하다 보면 2018년 4월 판문점과 9월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정상회담, 2018년 6월 싱가포르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 같은 대형 이벤트는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울 것도 실망할 것도 없다. 화려한 외교 이벤트의 막이 내린 뒤에 늘 허탈한 결말이 찾아오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한 지금으로선 조용한 소통과 대화가 한층 충실한 성과를 일궈낼 수 있다는 기대를 갖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것 아닐까?
국내 언론이 김 위원장의 연하장에서 주목한 문구는 ‘위대한 인민을 받드는 충심’이다. 휴대전화 가입자 수가 해마다 늘어 500만 명대에 이르고, 경제에서 장마당 같은 사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는 북한의 인민은 평화와 경제적 번영, 한층 개방되고 연결된 사회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민심을 김 위원장이 충심으로 받들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