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출범이 늦어지고 있다. 4기 위원 임기는 지난달 29일 종료됐지만 한 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국회 인사추천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9명으로 구성되는 방심위는 대통령, 국회의장(국회 각 교섭단체 대표위원과 협의해 추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각각 3명씩 추천한다. 현재까지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위원장으로, 김윤영 전 원주MBC 사장이 부위원장으로 각각 거론되고 있지만 모두 확정된 것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도 추천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완료까지는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출범이 늦어지는 사이 업무공백으로 인한 차질도 빚어지고 있다. 언론에 따르면 4기 위원 임기 종료 후 불과 일주일 만에 심의 안건이 6000건 넘게 쌓였다. 출범이 한 달만 늦어져도 2만건 넘는 안건이 처리되지 못하는 셈이다. 방심위에 접수되는 민원 가운데는 불법 금융 정보와 불법 촬영물 유포 등 국민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범죄 신고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디지털 성범죄는 빠른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에서 업무공백으로 인한 피해가 우려된다.
문제는 이런 ‘지각 출범’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7년 4기 방심위도 출범이 7개월이나 늦었고 3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 3기 방심위도 한 달 정도 늦게 출범했다. 지각 출범은 정치권이 위원 추천 몫을 나눠가지는 구조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로 관련 분야 전문가보다는 정치권이 점찍은 ‘자기 사람’을 채우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박병석 국회의장이 추천한 것으로 알려진 김윤영 전 원주MBC 사장은 박 의장과 대전고 동문이다. 여당 추천 인사들도 상당수 특정 시민단체 인사들이 거론되고 있다. 4기 심의위원 중 과거 미래통합당 추천으로 입성했던 전광삼 위원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비공개 공천 신청을 했다 논란을 일으켰다. 인선부터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다보니 심의 결과까지 정치적 공방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지난달 29일 강상현 4기 방심위원장은 이임식 자리에서 이런 현실에 대한 고충을 토로했다. “위원회가 심의의 공정성과 심의 업무의 독립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위원 구성에 있어 정치권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원회는 방송과 통신의 모든 내용과 관련된 사회적 기준을 정한다. 그런데 정치권 인사들이 오면 모든 것을 정치적 관점에서 당리당략의 눈으로만 보게 된다.”
방심위의 독립성은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심의위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외부의 부당한 지시나 간섭을 받지 아니한다.”(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20조 ①) 그렇다면 ‘정치권 인사’들은 정치권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일 수 있을까? 강 전 위원장의 고백은 솔직하다 못해 참담할 지경이다. “방심위를 방통위의 산하기관 정도로 아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방심위를 정부 기관으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이처럼 잘못된 인식에 기초해 심의의 공정성과 심의 업무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방심위는 3년 전에도 앓았던 홍역을 지금도 앓고 있다. 여야는 우선 5기 방심위가 조속히 출범할 수 있도록 빠른 시일 내에 인선을 마무리해야 한다. 심의 공백으로 국민이 피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 동시에 여야의 나눠먹기식 추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제도 개선이 없다면 방심위는 3년 뒤에도 같은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치권이 심의 독립성을 위협했다는 이임사를 또다시 들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