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사느라 시사평론가 직함으로 이런저런 방송 출연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분장을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어느 날은 분장사들이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질문을 하는 거였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우리나라만 맞는 거죠?”, “부작용이 상당하다는데 괜찮을까요?”
당신네 방송에 연일 의사들이 나와 백신은 안전하다고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려다(아마도 분장사들은 비정규직일 것이다) 말았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아는대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이미 해외에서 수천만명이 맞았고 접종을 미룰만큼의 부작용은 확인된 바 없다, 오히려 특정 조건에선 화이자 백신보다도 효과가 좋았다, 어느 의사는 백신을 맞는 사람 입장에서 아스트라제네카와 화이자 백신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가격차에 따른 기분 정도”라고 답하기도 했다…. 이런 설명으로 분장사분들이 납득을 하셨을지는 모르겠다.
언론에 의하면 백신에 대한 불신을 키워온 것은 정치권이다. 백신 확보가 늦었다는 지적에 여당은 안면마비 등 부작용을 거론했었는데, 시기를 고려하더라도 부적절했다. 야당 일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1호 접종자’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을 한 것도 경솔했다. 백신 불신이 심각한 수준이면 꺼낼 카드를 정치적 논란거리로 만들어 ‘오염’시킨 결과가 됐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는 데 언론의 역할도 컸다. 예를 들면 2월25일 보도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한국은 102번째 백신 접종국이다. 조선일보는 사설에 “우리나라가 어쩌다 아프리카·동남아 국가들과 같은 수준으로 백신 접종을 해야 하는가”라고 썼다. 다른 나라에 밀린 게 시기 뿐이 아닌 것 같아서 불안한 기분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보다 먼저 백신을 맞기 시작한 101개국 중 유럽연합에 속한 나라들은 백신 수급 관련 공동대응을 하고 있다. 그마저도 매끄럽지 않아 생산이 지연됐다는 이유로 각국이 백신 개발사와 신경전을 벌이는가 하면 한정된 물량을 두고 영국과 유럽연합이 서로 멱살을 잡는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방역엔 실패했지만 우리보다 훨씬 먼저 백신을 확보했다던 일본은 2월17일에야 접종을 시작했고 방역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뉴질랜드나 호주도 백신 접종은 같은 달 19일, 22일부터 의료인 중심으로 하고 있다. 우리보다 백신을 먼저 접종한 101개국 중에는 중국이나 러시아 백신을 쓰는 나라도 있을 거다. 등수를 논할 일일까?
물론 정부의 대응이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일일수록 문제의 원인을 찾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에 무게를 둬야 한다. 정치권과 일부 전문가의 편향된 주장을 기계적으로 인용하면서 근거없는 불안을 재생산해선 안 된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얼마나 있든 화이자, 모더나 백신 확보가 안 되면 소용이 없다는 식의 주장을 여과없이 그대로 옮기던 언론이 ‘기자수첩’ 따위를 통해 모든 백신은 안전하다는 전문가의 말을 믿지 않는 정치권을 꾸짖는 걸 보면 이게 다 뭐하는 건가 싶다.
조선일보는 1일자 지면에 백신 접종 속도가 느리다며 ‘거북이 접종’을 언급했다. 물량이 적어 접종 대상자도 제한적이고 접종 나흘차 시점에 주말과 연휴가 끼어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백신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한 이런 식의 비판은 1년 내내 가능할 것이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될까? 오히려 제대로 된 비판의 기회를 언론이 스스로 차버리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