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사측이 지난 2일 전국언론노조 SBS본부에 단체협약 해지를 통고했다. ‘임명동의제’ 조항 삭제를 노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다.
사측은 사내 알림글에서 “회사가 임명동의제 삭제를 요구한 것은 노조의 일방적 10·13 합의 파기로 인해 경영진 임명동의제의 근거가 없어진 데 따른 정당한 조치”라고 밝혔다. 또 “전 세계에서 경영진 임명동의제를 시행하는 방송사나 기업은 회사가 파악한 바로는 없다”며 “그럼에도 SBS가 경영진 임명동의제를 수용한 것은 윤창현 노조위원장이 대주주를 포함한 전 현직 사장들과 경영진 등 십 수 명을 검찰에 고발하겠다는 등 상식 밖의 협박을 하면서 노사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경영진 임명동의제는 전례 없는 제도이며 그 도입 또한 노조의 협박 때문이었으니 합의 파기를 이유로 폐기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시계를 돌려 2017년 10·13 합의 발표 당시로 가보자. 합의 엿새 뒤인 19일 발행된 SBS 사보 제1088호에는 ‘한국 방송 사상 최초! SBS 노사 양측, 사장 임명동의제 합의-공정방송의 확고한 기틀 다졌다’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기사는 “임명동의제는 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안으로서 국내방송 역사에 없었던 획기적인 조치다”라며 의미를 부여한다. 그로부터 3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획기적 조치’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로, ‘공정방송의 확고한 기틀’은 ‘상식 밖의 협박에 따른 타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 사보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건 ‘획기적 조치’를 운운한 그 다음 문장이다. “아울러 노사 양측은 이번 합의를 성실히 이행하고 사회적으로 보증받기 위해 2017년도 방송통신위원회 재허가 심사위원회에 합의 내용을 제출하기로 했다.” 이는 합의문에도 포함된 내용이다.
실제로 방송통신위원회에서 발간한 <2017년도 지상파방송 사업자 재허가 백서>를 보면 10·13 합의가 SBS의 재허가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삼석 방통위 상임위원은 “(10·13 합의가) 조건이 아니고 권고사항으로 부가됐지만 사장 임명동의제, 소유와 경영의 분리와 같은 노사 합의사항들이 성실하게 이행되어야 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방통위원들이 대체로 의견을 같이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백서 177페이지)
이 재허가 평가에서 SBS는 기준점수인 650점을 넘지 못했다. 방통위는 그러나 ‘제작·편성의 자율성’, ‘지배구조 개선’ 등의 조건과 ‘10·13 합의 이행’ 등 권고사항을 부가해 재허가를 의결했다.
SBS 사측은 합의문 가운데 “SBS 노사는 주주에게 이사 임면권이 있음을 존중하며,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내세운다. 노조가 주주의 이사 임면권을 존중한다는 약속을 스스로 뒤집고 대주주와 사장, 경영본부장 퇴진 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SBS 사측이 ‘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안’이라고 한껏 자랑했던 사장 임명동의제를 협상 테이블의 카드 한 장이었을 뿐이라고 말 하려면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임명동의제는 10·13 합의문과 SBS 노사 간 단체협약 문구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SBS가 시청자와 맺은 약속이다. 임명동의제가 담긴 합의문을 방통위 재허가 심사위원회에 제출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SBS 사측은 단체협약 해지 통고로 방통위의 권고사항을 내팽개쳤다. 재허가 조건과 권고사항의 이행여부를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는 방통위 역시 이 사안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시청자와의 약속을 가장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주체는 SBS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