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적 증오범죄와 언론의 틀짓기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이태영 텍사스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이태영 텍사스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지난 5년간의 미국살이에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강렬하게 의식된 건, BTS가 빌보드 차트에서 새로운 기록을 경신할 때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를 휩쓸었을 때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지난달 16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한국인 등 아시아계 여성 6명을 포함해 8명이 희생당한 사건이 일어난 후다. 필자가 연구하는 학교의 총장과 교수들의 명의로 된, 아시아인에 대한 전에 없는 연대와 지지의 이메일이 쇄도했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털어놓으라는 학과 교수들의 개인적인 이메일들도 받았다. 아시아인을 위한 교내 토론회, 행사들도 잇따랐다. (어떤 행사는 대화(conversation)의 철자를 바꿔 “conversAsian”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 필자가 조교로 일하는 저널리즘 교수는 수업 한 시간을 통째로 아시아인을 겨냥한 인종차별에 관한 토론으로 채우기도 했다.


미국 내 아시아인들에 대해 관심이 급증한 것은 언론이 해당 사건을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범죄(hate crime)로 ‘틀짓기(framing)’하면서부터다. 하지만 미 언론이 처음부터 이 사건을 인종차별적 범죄로 본 건 아니었다. 사건 직후 미 주류언론들은 총기난사 용의자가 성중독자였다는 사실을 부각하면서 혐오범죄의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인상을 줬다. 심지어 용의자가 몹시 지쳐 보였다면서 “어제는 그에게 정말 나쁜 하루였을 뿐 인종차별로 인한 범죄는 아니다”라는 보안관의 말을 그대로 기사 제목으로 내보낸 매체도 많았다. 초기 보도 가운데, ‘아시아 여성’이라는 인종·성별 측면에서 복합적인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범죄라는 점을 지적하거나, 인종차별주의가 종종 성적 착취나 폭력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설명한 해설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미국 내 아시아 사회의 여론이 들끓자, 언론들은 뒤늦게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보도의 방향을 선회했다.


미디어 이론 중 하나인 틀짓기 이론 (framing theory)에 따르면, 언론은 사건을 보도할 때 특정한 정보를 강조 또는 누락함으로써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일종의 틀을 제공한다. 보도와 무관하게 독자들이 사건을 고유하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언론이 제시하는 틀은 독자들의 뉴스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미디어가 제시하는 프레임이 특권층에게 유리한 경우가 많아 언론보도와 실체적 진실에 간극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의 초기 보도는 전형적으로 언론보도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경찰 관계자들의 증언을 부각함으로써 사건의 본질이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뒤늦게나마 프레임을 전환했지만 미 언론의 보도는 여전히 실체적 진실에는 다가가지 못했다. 대다수의 언론은 코로나19 확산을 중국 탓으로 돌린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 인해 동아시아인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것을 이번 사건과 연결지었다. 그러나 코로나19를 계기로 아시아인 대상 범죄들이 주목을 받은 것일 뿐, 아시아인들은 오랜 시간 미국 내에서 각종 인종차별과 범죄에 노출돼 왔다. 코로나19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면 또다시 아시아인에 대한 범죄는 증오범죄가 아닌 단순 폭행 등의 사건으로 분류돼 관심 밖으로 멀어질 공산이 크다.


갑작스러운 아시아인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느 사건처럼,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 또한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틀짓기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특정 집단에 대한 미디어의 보도 방식이 해당 집단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형성한다고 지적한다. 인종주의(racism) 담론에서조차 배제되기 일쑤였던 아시아인들에 대한 관심이 모처럼 집중됐던 시기에 언론이 제대로 된 프레임으로 사건을 다뤘다면 어땠을까.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사회의 인식을 조금은 바꿀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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