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누구를 위한 열풍인가

[이슈 인사이드 | 금융·증권] 이혜진 서울경제신문 증권부 차장

이혜진 서울경제신문 증권부 차장

“ESG 열풍을 넘어 광풍 수준이다.”


최근 자본시장연구원이 주최한 ESG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 패널이 한 말이다. 요즘 경제계 최대 화두를 꼽자면 단연 ESG다. ESG란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고려하는 경영이나 투자 방침을 뜻한다.


산업이나 금융계 출입 기자들이 기업 관계자들에게 물으면 아마 열에 아홉은 “ESG 이슈가 최대 관심”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ESG 경영선언, 위원회 설립 등에 대한 보도자료가 쏟아지고 행사 개최가 잇따른다.


기자들은 본디 ‘불신 지옥’에 빠져 사는 족속인지라 필자는 갑자기 불어 닥친 ESG 열풍에 어리둥절하다.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이 주장해야 할 법한 일을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 단체들이 주도하고 있는 점도 특이한 대목이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해외를 돌아보면, ESG 열풍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는 1990년대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이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노동권, 환경, 인권이 훼손됐다. 기업들에 시정 조치를 요구했지만 들어먹지 않았다. CEO들의 연봉은 주주의 손에 달려 있었고, 주주들은 돈을 많이 벌어다 주는 CEO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UN은 자본은 통한 기업 통제로 방향을 틀어 책임투자원칙(PRI) 등의 아젠다를 만들어 거대 투자사, 기금 등을 독려해왔다.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움직임은 더 강력해졌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후보 시절 “주주 자본주의를 끝내고 싶다”고 예고했다. ‘자본가의 화신’과 같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출신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행정부에 줄곧 입성해왔지만, 바이든 정부엔 블랙록 출신들이 대거 포진했다. 블랙록은 “기후 리스크가 곧 투자 리스크”라고 주장하며 ESG 전도사를 자처하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다.


뒤늦게 글로벌 트렌드에 동참한 한국은 역시 한국답게 빠르고 요란스럽게 ESG 유행을 받아들이고 있다. 기업들마다 앞다퉈 조직을 만들었고 금융회사들은 ESG 투자 원칙을 천명하며 상품을 찍어 내고 있다. 그러나 조직의 역할은 모호하고 기존 금융상품과의 차별성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핵심인 ESG 평가와 관련해 그야말로 난맥상이 펼쳐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외에서 600개의 ESG 평가지표가 난립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도 신사업의 호기를 놓치지 않고 ESG점수를 매겨 수많은 기업을 줄세우며 각종 포럼과 시상 등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ESG점수 잘 받는 법에 대한 컨설팅 서비스를 해주는 회사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최근 만난 대기업 관계자는 “우리 회사가 왜 그 ESG 점수를 받았는지 알고 싶다고 문의하자 수백만원짜리 보고서를 사라고 해서 사서 봤다. 하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ESG를 제대로만 한다면 수십 년간 세계를 휩쓴 주주 제일 자본주의의 버그를 수정하는 훌륭한 패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난맥상을 보고 있자니 한국의 ‘빨리빨리’와 ‘쏠림’ 문화의 부작용이 여기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를, 후세를, 사회를 이롭게 하자는 ESG의 본질 대신 기업의 마케팅술과 이를 활용하려는 집단들만 이롭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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