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1일, 일본에서 65년 만에 가장 이른 장마가 시작됐다. 계절의 여왕으로 불리는 5월이었지만 우리도 거의 이틀에 한 번 비가 내리면서 벌써 장마가 시작된 것 아니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장마의 기상학적 정의는 ‘여름철 정체전선(장마전선)에 의해 내리는 비’다. 일본의 경우 남쪽 북태평양 고기압이 확장하면서 장마전선을 끌어올려 공식적인 장마가 시작됐지만 우리는 아직 장마전선의 영향권에 들지 않았다.
잦은 비를 몰고 온 것은 저기압이었다. 북동쪽 상층에 차가운 성질의 저기압이 정체하면서 주기적으로 비구름대가 만들어져 우리나라를 통과한 것이다. 남서쪽에서는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밀려와 벼락과 우박을 동반한 집중호우도 퍼붓곤 했다.
비가 자주 오는데다가 봄비 치고 강도도 강했기 때문에 장마와 혼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원인이 장마전선이건, 저기압이건, 소나기구름이건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는 똑같은 비다. 그래서 장마를 ‘기상 현상’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비가 많이 오는 ‘시기’, 즉 ‘우기’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보통 장마는 6월 하순 시작돼 한 달 정도 지속되다가 7월 하순 끝난다. 기나긴 장마가 물러나면 폭염과 열대야의 시간이 찾아오기 때문에 학교가 방학을 하고 휴가를 떠난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장마가 끝난 뒤에도 폭우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인 5월부터 비가 잦고, 9월, 10월까지도 국지성 폭우와 태풍이 이어지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장마가 끝나면 비가 별로 안 올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에 산지와 계곡을 찾았던 피서객들이 고립되는 등 피해가 커졌다.
그래서 기상청은 2009년부터 장마의 시작과 끝을 예보하지 않고 사후 분석만 진행하고 있다. ‘변종’ 장마가 잦아지는 등 장마의 변동성이 커진 것도 이유다. 비가 오지 않는 ‘마른장마’, 중부지방이나 남부지방에만 비를 퍼붓는 ‘반쪽장마’, 정해진 시기보다 늦게 찾아오는 ‘지각장마’, 가을까지 계속되는 ‘2차 장마’(가을장마) 등 장마에 붙은 별명만 해도 이렇게나 많다. 특히 지난여름에는 1973년 관측 이후 가장 긴 장마가 기록됐다. 중부지방에서 6월24일 장마가 시작돼 광복절 다음날인 8월16일까지 54일간 끝나지 않았다. 역대 최장 장마로 침수와 홍수, 산사태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기상전문기자로 매해 여름이 힘들지만, 특히 지난해는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에 밤샘 특보를 하면서 기후위기를 실감했던 기억이 난다.
기상청은 지난달 24일에 3개월 전망을 발표했다. 핵심은 ‘초여름 많은 비’와 ‘강한 폭염’이었다. 상층 한기와 남쪽 더운 공기가 충돌하며 6월부터 비가 많이 오고 장마 시기는 평년과 비슷할 전망이다. 폭염은 평년보다 심한 가운데 특히 8월 무더위가 절정일 것으로 기상청은 내다봤다.
장기예보에 존재하는 불확실성 때문에 무조건 맞을 거라고 볼 수는 없지만 지난해 극한 장마를 겪은 만큼 올해는 벌써부터 비장해진다. ‘전투’에 나가는 ‘장수’의 심정이 이럴까? 폭우든, 폭염이든, 태풍이든 무조건 ‘센 놈’이 하나 이상은 올 거라는 마음으로 대비해야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상전문기자가 바쁘지 않은 ‘평온한’ 여름이 되면 정말 좋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