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만족도 43.3%. 기자협회보가 회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다. 10명 중 4명 남짓이 기자라는 직업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이마저도 3년 연속 떨어지는 추세로 앞으로 어디까지 떨어질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집계한 최근 20년간의 직업 만족도 조사에선 통계 범위인 30위를 벗어나 순위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이 수치를 보고 아무도 놀랄 사람이 없다는 데 있다. 기자 직군에 대한 자부심과 보람이 추락했다는 공감대는 비단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당연한 것 아니냐는 자조로 웃어넘기기엔 어쩐지 씁쓸해진다. 현장에서 느끼는 온도는 그보다 싸늘하기 때문이다. ‘만족도’라는 표현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단순히 만족도가 떨어진다고 하기엔 하루하루 현장에서 부딪히는 자괴감과 한계가 만족을 압도한다. 사주나 주주의 이익이 아닌 공익을 위한다는 마음속 어느 곳에 자리했던 작은 자부심. 조직이 이용할 수 있었던 기자라는 직업의 알량했던 그 동기마저도 이젠 언론사들의 경영 악화로 내세우기 힘든 장점으로 전락했다. 훗날 내 자식에게 기자라는 직업을 추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다.
마냥 조직에 책임을 돌리자니 그마저도 궁색하다. 인력을 늘린다고 해결될 것 같지도, 대우를 개선한다고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 현실은 더 큰 비극이다. 오히려 변화를 위한 조직의 생존 전략은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듯하다. 너도나도 ‘디지털 퍼스트’ 전략으로 조회 수와 댓글 등 독자의 반응에 민첩하게 대처했다. 조회 수가 가장 높았던 기자에겐 인센티브까지 주어졌다. 독자들의 삶에 유리되지 않는 생활 밀착형 기사, 어려운 내용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동시에 꼭 전해야 할 기사보다 소위 잘 팔리는 기사가 대접을 받게 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 광고를 그럴 듯하게 기사처럼 써내는 능력이 더 필요한 시대가 올지도 모른단 것도 비단 상상의 영역이 아니게 됐다. 그런 기사를 생산해내며 내 만족감도 스스로 찾아야 하는 환경이 된 것이다.
달라진 언론에 대한 인식도 넘어야 할 산이다. 기사로 대중의 칭찬이나 환호를 기대하는 건 아니더라도 적어도 다른 생각을 가진 독자들의 비난과 힐난을 바라는 기자는 없다. 오보나 억지 주장으로 인한 비판이라면 달게 받겠지만 정파성이 생존의 필수품이 돼버린 언론 환경에선 반대편의 비난을 피할 기사는 많지 않다. 집회 참가자 수, 성별, 특정인물, 조직 등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기사라면 좌표로 찍혀 비난 폭탄 메일은 각오해야 할 지경이다. 기레기란 표현까지 끄집어낼 필요도 없다. 자고 일어나면 늘어있는 언론사 숫자에 같은 기사는 반복되고, 사건이 터지면 주요 취재원에게 수십 명의 기자들이 동시에 전화하는 상황에서 어딜 가든 기자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돼버렸고, 그 작은 팩트 하나 확인하겠다며 수십 명 중 하나의 기자가 될 수밖에 없는 미약한 개인의 자존감만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다.
기사 만족도. 그런 조사가 있다면 기자 만족도의 추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즐겁게 일한 요리사가 더 맛있고 질 좋은 음식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듯 기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만족도를 위해 우리 환경을 좋게 만들자는 낯 뜨거운 고민을 하자는 게 아니다. 피해는 결국 독자들에게 돌아간다. 물론 뾰족한 대안은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묻고 또 묻고자 한다. 업계를 떠나지 않을 거라면, 스스로 만족하는 기사를 쓰고 싶다면 반드시 스스로에게 또 서로에게 되묻고 고민해야 할 질문이다. 우리는 이 직업에 만족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