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중재 및 피해구제법 개정안은 여의도 정치의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되었다. 여당은 상임위원장 배분 전에 ‘밀린 숙제’를 끝마쳐 지지자들의 칭찬을 받고자 했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이 법의 통과를 막는 일에 힘써 대여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고 내분을 수습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이러다보니 거대정당의 이해관계 앞에 실제 이 법 개정안이 현실에서 어떤 피해를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지는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 것 같다.
여당은 야당과 언론시민단체 등의 반발을 수용해 개정안의 미비점을 보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법안 자체라기보다는 정부 여당의 정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득권과의 대결 구도를 통해 법·제도적 성과를 도출해내야 한다는 인식이 오히려 개혁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언론개혁의 필요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잘못된 언론 보도에 의한 돌이킬 수 없는 피해 사례는 숱하게 많다. 문제는 그러한 일이 왜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의 정치적 논리는 이러한 일이 ‘악의’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한다. 언론의 현실로 볼 때 ‘악의’의 근원은 크게 두 개의 축이다. 첫째는 권력, 둘째는 자본. 언론의 과거와 오늘을 돌아보건대 정파와 돈에 휘둘린 악의적 보도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특별한 ‘악의’가 작용한 게 아니더라도 언론 보도에 의한 피해는 언제든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구조적 문제이며 언론 생태계 전반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은 이러한 큰 그림의 한 요소로서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는 전후가 뒤바뀌어 있다. 개혁의 일환으로 ‘징벌’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징벌’이 필요하기에 개혁이 불려 나온 듯한 모양새다.
가령, 정치권이 법·제도적 개선에 나설 때에는 거기에 어떤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민식이법’은 스쿨존에서의 교통사고라는 안타까운 사연이 촉발한 예이다. 그렇다면 이번 논의의 계기는 무엇인가? 선뜻 답하기 어렵다. 이러면 그동안 정부 여당이 ‘잘못된 보도’라고 주장해온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되짚을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자신들의 통치에 걸림돌이 되거나 정파적 이해관계가 걸린 사례가 대다수였다. 여당 지지자들이 몰두하는 조국 전 장관 관련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니 법을 어떻게 만들든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보도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못된 보도의 힘없는 피해자들, 가령 비정규직 노동자나 영세자영업자의 피해가 언론개혁을 말하는 정치의 주변이 아닌 중심에 있었다면 상황은 지금 같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 여당의 이런 접근에 대해 혹자는 ‘386정치’의 특수성을 얘기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런 현상은 오히려 보편적이다. 언론이 그렇듯 정치 역시 악의와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그저 그렇게 될만해서 나쁜 결과가 나오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정파불문 상대의 가장 나쁜 모습을 일반화해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나의 주장으로 100명을 설득하긴 어렵지만, 99명이 1명을 반대하도록 하는 건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쁜 놈’을 제거해도 현실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 진실을 마주하고 ‘나쁜 놈’이 아닌, 세상 그 자체와 싸우는 것이 개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정권의 개혁은 이미 실패했다는 것을, 오늘의 이 논란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