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 3A와 OX게임

[글로벌 리포트 | 일본] 지종익 KBS 도쿄특파원

지종익 KBS 도쿄특파원

“코로나 감염자가 늘면 락다운(도시봉쇄)을 한다?!”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둔 어느 날, 민영방송 뉴스의 한 장면. 후보 4명을 스튜디오로 불러 코로나 대책에 대한 생각을 묻고 있었다. 진행자가 질문을 던지면 후보들이 OX표를 들어 찬반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첫 질문에 후보들은 당황했다. ‘락다운’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았고, 생방송이라는 점도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건 차기 총리로 유력했던 기시다의 태도였다. 표를 들기 전에 몇 번이고 좌우를 흘깃흘깃 살피는 모습이 그대로 방송을 탔다. 4분할 화면은 그런 표정을 더욱 잘 보여줬다. 두 번째 질문, “전 국민에게 신속하게 지원금을 지급한다?!” 기시다는 이번에도 좌우를 한 번씩 살피는 듯하더니 “이 질문은 세모”라며 양손의 OX를 한꺼번에 들었다. ‘저런 사람이 총리가 될 수 있을까?’ 거슬리긴 했지만 ‘강단 없음’이 특징인 그와 잘 어울리는 표정과 행동이었다. 더욱이 너무 드러내지 않는 게 미덕이 되기도 하는 나라이니 꼭 이상하게만 볼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시다의 ‘우유부단함’과 청중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발신력’은 선거 기간 내내 ‘약점’으로 꼽혔다. 경쟁상대였던 고노 다로는 정반대였다. 강력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던졌다. 하필이면 고노와 맞붙은 기시다의 약점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기시다 총리가 기자회견을 하면 채널이 다 돌아가고 말 거다”라며 사람들은 비웃었다. 기시다는 자신의 최대 강점이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이라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발신력을 어떻게든 극복해보고자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정파성이 강한 일본 언론은 이해관계에 따라 기시다의 발신력을 문제 삼거나 ‘안정감’으로 포장했다.


기시다가 안고 있는 약점과의 인과관계는 알 수 없지만 민심은 고노였다. 1차 투표에서도 ‘고노 1위’가 예측됐다. 한 지붕 아래 있는 기시다와 다카이치 진영에서는 아베-아소에 반기를 든 고노를 어떻게 떨어뜨릴지 전략을 세우기에 바빴다. 아베의 지지 덕분에 크게 선전한 다카이치의 표를 결선에서 기시다에게 몰아줬고, 고노는 완패했다. 민심은 무관했다. 선거는 ‘3A’의 의중대로 끝났다.


아베(Abe)-아소(Aso)-아마리(Amari). 자민당 권력의 핵심이자 극우로 묶인 ‘맹우’ 3인방의 머리글자를 따 ‘3A’라고 칭한다. 셋이 합쳐 무려 35선이다. 아베는 투표 작전을 지휘하며 “다카이치에게 투표하되 기시다 쪽 표에는 손대지 말라”고 지시했다. 아소파에서 두 명의 후보가 총리를 하겠다고 찾아왔지만 아소는 고노를 버리고, 기시다를 밀었다. 아베 정권에서 ‘경제 보복’ 조치를 설계한 아마리는 기시다의 선거대책본부 고문을 맡았다.


아베의 정적 이시바와 연대한 고노는 패한 뒤에도 치욕을 맛봐야 했다. 다른 후보들을 중용한다고 했던 기시다는 고노에게 이름도 생소한 ‘홍보본부장’을 맡겼다. “고노는 찬밥 좀 먹어야한다”는 게 아소의 말이었다. 기시다는 주변국과의 우호를 중시하는 코우치카이(지금의 기시다파) 출신의 온건파로 분류되지만, 당과 내각의 요직을 3A 휘하의 극우 인사들로 채웠다. 기시다의 자민당, 기시다의 내각이 탄생했지만 일본 언론들은 ‘아베 컬러’라고 정의했다. 투표 과정부터 내각 구성까지, 기시다는 일본 정치의 후진성을 알기 쉽게 보여줬다.


자, 우리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다. 한일관계가 달라질 수 있을까? ‘우유부단’ ‘카리스마 없음’ ‘발신력 부족’. 일본에서 뭐라든 간에 한국에서는 ‘4년 반이 넘는 최장수 외무상’, ‘아베를 설득한 위안부 합의의 당사자’라는 수식이 따라다녔다. 스가 내각의 역할이 전무했기 때문에 ‘적어도 대화에는 나설 것이다’ 정도의 추론도 해볼 만했다. ‘외교 문외한’과 ‘외교통’이라는 비교도 가능했다.


그러나 기시다는 또 한 번 ‘아베 없는 아베 정권’을 선택했다. ‘아베-스가로 이어진 아베 정권이 9년 만에 막을 내린다’라고 섣불리 단정했던 언론들은 좀 민망하게 됐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 맞닥뜨린 기시다가 손에 쥔 OX표를 스스로 들어 올릴 수 있을까? 그는 첫 단추부터 ‘기시다 컬러’를 과감히 포기하고, 3A의 의중에 순응했다. ‘일본의 100대 총리’라고 쓰기에는 여전히 어색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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