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맞고 당신은 틀려야 사는 곳은 정치권만이 아니다. 이들의 세(勢)를 알려주는 여론조사 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걸 조사해도 많게는 20%p가까이 벌어지는 탓에 서로가 정답이라며 아웅다웅하고 있다. 막상 정답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오답도, 정답도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정치가 곧 여론조사고, 여론조사는 정치꾼이 되어버렸다.
오늘도 조사 결과는 쏟아져 나오고, 불신과 정보를 동시에 배출하는 아이러니를 미디어는 연일 보도한다. 불편한 동거다. 보다 못해 숫자가 아니라 추세를 보라는 지침을 주지만, 심지어는 그 추세도 기관마다 다르다. 대선이 넉 달이나 남은 이 시점에서 모든 유권자 한 명 한 명에게 따져 묻지 않는 이상 시비를 명확히 가르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좋은 소식은 넉 달 뒤엔 가능하다는 점이다. 각 조사회사가 선거 전날까지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그 마지막 결과와 실제 선거 결과를 유권자가 직접 비교하면 된다. 단순히 더하기 빼기만 해도 어떤 기관이 더 정답에 가까운 값을 내놓는지 알 수 있다. 다음 선거부턴 어느 조사를 믿어야 할지 그보다 더 잘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맞다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조사기관이라면 이 훌륭한 모객 방법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가 정답이란 걸 증명할 절호의 기회다. 물론 여론조사는 투표할 자격이 주어지는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선거 결과는 그들 중 투표장에 나온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투표할 사람을 잡아낼 수 있는 문항을 개발하면 된다. 문항 개발 역시 조사회사의 역량을 보여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투표할 사람(likely voter)을 조사한 결과를 따로 내기도 한다.
나쁜 소식도 있다. 바로 여론조사 공표 금지기간이다. 공식적인 선거 유세 기간도 2주 밖에 안 되는데, 절반은 여론조사 결과를 널리 알릴 수 없다. 선거일까지 일주일 전 여론조사가 최신이다. 유권자는 더하기 빼기만 하면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고, 여론조사 기관은 내가 맞다고 증명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 동안 조사가 돌아가지 않는 건 아니다. 공표가 금지된 것이지 조사가 금지된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소위 꾼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깜깜이 기간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숫자가 적힌 지라시가 단톡방에서 돌고 돈다. 조사 회사 내부적으로 조사를 해봤는데 골든크로스가 일어났다거나, 결집이 일어났다는 등 사후적인 설명도 길게 붙인다. 꽤 괜찮은 변명거리지만 진짜 그랬는지는 영영 알 길이 없다. 그 기간 동안 조사된 결과는 한 번도 대중에게 공개된 적이 없다.
유권자가 여론조사에 미혹되어 선거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 일주일이나 여론조사 공표금지를 하는 이유다. 독재가 아니라면 ‘여론’에 의해서 유권자 스스로 그 의견을 바꾸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백 번 양보해서 문제라 하더라도, 이를 국가가 간섭할 이유도 없다. 여론조사 업체를 위해서 없애자는 게 아니다. 여론조사 공표금지는 여론조사 자체에도, 조사 기관에도, 언론사에게도, 유권자에게도, 또 민주주의에도 모두 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