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말. 대학의 문에 들어서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역사를 알아갔고 그 깨달음 속에 주먹을 쥐었다.
‘군부독재 타도하자’ ‘독점자본 해체하라’라는 구호들이 가득했다. 그 시기 쿠데타의 핵심 군부세력이 권력을 장악했고, 자본은 그들에게 실탄을 제공했다. 그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부조리에 대한 타파 의지로 가득했다.
그러다가 사회에 나와 북한과 남북관계를 다루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며 재평가를 하게 된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최근 세상을 등진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쿠데타를 주도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역진시킨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가 만든 남북화해의 노력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1988년 7·7선언으로 시작한 노 전 대통령의 화해 노력은 1989년 통일로 가는 과도적 체제로 ‘남북연합’을 제시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통일방안은 당시 야당의 동의를 이끌며 ‘초당적 협력’의 사례를 만들기도 했다.
1990년 9월4일 남북한의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됐고 1991년 12월 제5차 회담에서는 ‘남북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다. 합의서에서 남북은 당장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공동 인식 아래 상호 인정, 군사적 불가침, 교류·협력을 통한 점진적 통일을 천명했다. 사실 기본합의서 이후 나온 남북 합의는 대부분 이 합의서의 아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위한 기본을 담았다.
남북대화가 급물살을 타는 가운데 1991년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남북한 유엔 가입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같은 해 9월17일 유엔총회는 남북한과 마셜군도 등 7개국의 유엔가입 결의안을 일괄 상정하여 표결 없이 통과시켰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기본합의서, 유엔 동시가입은 현재의 한반도 질서를 규정하는 틀이다.
다른 재평가의 대상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권력과 결탁해 자본을 불려가며 문어발식 그룹경영으로 한국 자본주의에 적잖은 폐해를 남겼지만, 분단을 넘어서려는 자본가의 의지는 평가할만 하다.
북한이 고향인 정 명예회장은 1989년 1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관광사업과 시베리아 남북공동진출, 원산 조선소 합작 등 3개 항에 합의했다. 이 합의는 김대중 정부의 금강산 관광사업과 노무현 정부의 안변 조선소 합작 합의로 이어졌고, 박근혜 정부 때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로 생명력을 이어갔다.
그리고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소떼를 이끌고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금강산 관광사업의 실천을 이끌어냈다.
정 명예회장의 구상은 단순히 관광에만 그치지 않았고 북한의 산업 전분야를 선점해 대륙으로 나가는 기반을 닦으려는 의지를 가졌다.
“길을 모르면 길을 찾고, 길이 없으면 길을 닦아야 한다.” 정 명예회장의 말에서 분단이라는 민족문제 속에서 길을 만들려는 기업가의 모험심이 읽힌다.
다시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고 선거의 계절이 찾아왔다. 다시 남북문제가 정치의 한복판 속으로 던져질 태세다. 한반도의 새로운 길을 찾아 열려고 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생전에 남긴 화해의 노력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