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김상열 호반건설그룹 회장의 이른바 ‘일감 몰아주기’ 정황을 포착해 김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지난 17일 이 사실이 알려진 후 대부분 언론이 김 회장의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를 기사화했다. 이튿날인 18일 일부 종합 일간지는 지면에도 관련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같은 날 서울신문에는 ‘호반, 현장근무자 5000명에게 5억 상당 격려품’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을 뿐이었다. 서울신문 홈페이지에도 김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물론 호반건설에 부정적인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예견된 사태였을지도 모른다. 호반건설이 대주주가 된 후 서울신문의 호반 비판 보도는 일괄 삭제됐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의 2019년 ‘호반건설그룹 대해부’ 시리즈는 지난 1월 서울신문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에서 사라졌다. 삭제된 기사들은 호반건설의 편법증여 의혹과 아파트 하자 논란 등을 검증하는 연속보도였다. 곽태헌 서울신문 사장 등이 참석한 ‘6인 협의체’의 기사 삭제 결정은 신속하게 실행됐다. 민주적 언론사에선 보기 힘든 하달식 업무 처리는 군대식 문화가 남아있는 건설사를 연상케 했다.
그때와 지금, 상황은 닮았지만 서울신문 내부 기류는 달라졌다. 두 달 전엔 서울신문 안이 시끌시끌했다. 1월16일 기사 삭제 결정이 사내에 공지된 후 기자들은 기수별 성명을 내며 반발했다. 한국기자협회도 “편집권 침해 사태에 낯이 화끈거린다”고 성명을 냈고, 26일 열린 기자총회에서 기자들은 기사 삭제에 대한 사과문의 지면 게재와 사장의 사과를 요구하기로 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지금 서울신문 내부는 그때와 달리 조용하다. 이 침묵을 견디지 못한 막내급 기자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15일 서울신문 52기 기자들은 사내 게시판에 “기사 삭제 사태 두 달, 무엇이 바뀌었느냐”고 물었다. 기자 수십 명의 요구에도 입을 닫고 있는 곽태헌 사장 등에 “갈수록 무력감에 젖어가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 참담하다”고 호소했다.
잇따른 편집권 침해를 어떤 설명도 없이 넘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6인 협의체의 기사 삭제 지시는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선례로 남을 수 있다. 비판적인 보도에 대한 내부의 자기 검열은 사주를 넘어서 관련 업계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다. 호반건설의 일감 몰아주기 의혹은 한 자도 쓰지 않는 언론사가 보도하는 타 건설사의 꼼수 고용 승계 의혹이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최고의 역사 118년’을 자랑하는 서울신문은 기자들 사이에서도 끈질긴 취재력과 촘촘한 기사로 인정받아왔다. 이대로 언론사로서의 신뢰가 떨어진다면 기자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장기적으로는 취재력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48기 기자들도 21일 “침묵은 답이 아니다”며 추가로 성명을 냈다. 책임 있는 선배 기자들이 이번 52·48기의 성명을 그대로 넘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언론계도 문제 제기를 이어가야 한다. 사주의 편집권 개입은 서울신문만의 문제가 아니다. 넓게 보면 경제권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수많은 언론사와 정치권력의 부침에 휘둘리는 공영방송도 같은 싸움을 하고 있다. 공적 콘텐츠인 기사를 생산하면서 수익을 내야 하는 언론의 딜레마를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면 건강한 저널리즘은 이상으로 남을 뿐이다.
호반건설은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서울신문은 독립적인 기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100년이 넘는 세월을 기록해 온 유서 깊은 언론사다. 호반이 언론사 최대 주주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소한의 저널리즘조차 저버린다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되겠다는 다짐은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