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노트북 바탕 화면에는 독특한 이름의 동영상 파일이 깔려 있다. ‘맥주 한 잔 하실래요.MPEG’.
이 글을 쓰는 오늘로부터 정확히 1년 전인 2021년 3월19일 중앙노동위원회의 역사적인 판정이 있었다. 수십 년간 ‘창작자’라는 도식에 갇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던 방송작가에 대하여 처음으로 ‘프리랜서가 아니라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노동자’라고 판단한 것.
그날 방송작가 노동조합 전·현직 임원들과 당사자들은 함께 숨을 죽이며 저녁 8시에 필자에게 자동 전송될 문자 메시지를 기다렸다. 마지막 고등법원 판결 이후 20년 만에 과연 중노위가 상식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릴지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인정’이라는 문자를 받는다면 시원한 맥주로 축배를, ‘기각’된다면 쓴 소주를 나누기로 정했다.
2분 늦게 도착한 문자를 확인한 순간, 필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건넨 말, “맥주 한 잔 하실래요?” 그 순간 터진 환호성이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데 벌써 1년이 흘렀다. 그리고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중노위의 판정 이후 지상파 방송사 지역총국 작가에 대한 노동자성 인정 사례가 이어졌다. 고용노동부는 근로감독 개시 이후 70년 만에 처음으로 지상파 3사에 대한 동시 근로감독을 실시해 보도, 시사 분야 작가 무려 152명에 대하여 ‘근기법상 근로자’라고 판단하였다.
이 글을 쓰기 전날, 서울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또 다른 방송사 프리랜서 작가에 대하여 근로자성을 인정한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이쯤 되면 이제 방송작가, 적어도 재량에 의한 원고 작성이 불가능한 ‘보도·시사’ 분야 작가들에 대한 노동자성 인정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사 내부에는 아직 변화가 감지되지 않는다. 방송국의 사용자들은 잇따른 노동위의 ‘상식적 판단’ 이후 어떻게 왜곡된 고용구조를 고칠 것인지 고민하는 대신 ‘불복’으로 맞섰다. 심지어 일부 방송사는 노동부의 시정명령 이후 작가와의 근로계약 체결 과정에서 ‘앞으로도 작가직군을 정규직으로 채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더불어 사용자뿐 아니라 필자가 만난 다수 정규직들은 “작가들은 원래부터 프리랜서 아닌가”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원래부터 프리랜서’라면 과연 방송작가들에게 그러한 ‘사회적 신분’이 주어지는 시점은 언제일까. 대법원에 따르면 방송작가들이 진정한 프리랜서인지 여부는 그들이 방송사의 조직에 편입되어 일하는 ‘실질’을 살펴봐야 판단 가능하다. 그럼에도 항상 방송국들은 채용 전부터 ‘방송작가=프리랜서’로 못을 박는다. 법률 다툼 과정에서도 모든 사용자 방송사들은 “엄격한 채용 절차에 응모하여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입사한 공채 정규직과 알음알음 일을 시작한 프리랜서들은 애초부터 신분이 다르다”는 공통된 주장을 펼친다. 갈 길이 참 멀어 보인다.
오늘 오랜만에 1년 전의 동영상 파일을 클릭했다. 그 날 축배를 함께 나누던 작가들은 여전히 일터로 돌아가지 못한 채 사용자가 제기한 행정소송에 맞서는 중이다. 끝나지 않은 싸움이지만, 오늘만큼은 앞서서 길을 내고 있는 모든 ‘무늬만 프리랜서’들에게 응원과 위로의 잔을 건네고 싶다. “맥주 한 잔 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