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에 수십 권씩 책 신작들이 쏟아진다. 그 중 가장 직관적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독특한 제목이나 표지, 두께 등 책의 외관이다. 지난달 8일 출간된 드래그 아티스트 모지민 작가의 에세이집 ‘털 난 물고기 모어’(은행나무)는 두께에서 확연히 다른 책들과 차별화됐다. 책은 무려 476쪽에 달했다. 통상 에세이는 250~300쪽 안팎이다. 에세이는 가볍게 읽는 장르인데다 MZ세대들은 긴 글을 읽는데 익숙지 않다는 출판사 판단 때문이다. ‘감히 에세이가 476쪽?’이라는 호기심에 표지를 넘겨본 이가 필자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 분량보다 더 놀라웠던 사실은 작가가 책 대부분을 노트북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썼다는 것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모 작가는 집이 경기 양주시였다. 일을 위해 서울까지 오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초고의 90% 이상은 스마트폰으로 쓰여졌고, 그 중 괜찮은 글들을 노트북으로 옮겨 다듬었다는 그의 이야기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가 2019년 6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스톤월 항쟁(1969년 미국에서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벌인 집단 데모) 50주년 기념 공연에 초청됐을 당시를 다룬 챕터 ‘해피 뉴욕 타임스’는 그가 뉴욕 지하철에서 썼다. “제 핸드폰이 오래된 기종이라 배터리가 늘 간당간당 했어요. 지하철에서 콘센트를 찾아 코드를 꼽고 하염없이 글을 썼죠.”
스마트폰으로 500쪽에 달하는 분량의 책을 낸 모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니 예전 한 영화감독의 일화가 떠올랐다. 지금은 타계한 A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건, 영화 관계자들과 함께하는 식사자리에서건 늘 골똘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곤 했다고 한다. 그와 함께 작업한 한 스태프는 “‘저 감독은 왜 늘 스마트폰을 손에서 못 놓나’ 했는데 알고 보니 스마트폰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불현듯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붙들어놓기 위해 한 문장, 두 문장씩 스마트폰으로 적기 시작한 게 습관이 됐을 것이다. 그 감독은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니스, 베를린, 칸 국제영화제 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살아생전 누렸다.
해외에는 스마트폰으로만 글을 쓰는 작가도 있다. ‘더 배럴’(2017년) 등을 펴낸 미국 스릴러 소설가 어거스트 버치는 그의 모든 소설을 스마트폰으로 쓰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인간이 움직일 때 뇌가 가장 창의성을 발휘하기 좋은 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지하철에 서 있을 때, 여럿이 모여 재미없는 대화를 나눌 때를 이용해 스마트폰으로 글을 써보라고 그는 제안한다.
뉴욕 지하철 안에서, 식사자리에서, 횡단보도 앞에서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열심히 엄지를 놀리며 글을 썼다는 여러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글쓰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고요한 숲 속에서 속세와 단절한 채 종이에 글을 써야 한다거나, 서재에 틀어박혀 꼼짝 않고 노트북 커서를 오른쪽으로 한 자 한 자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자. 스마트폰으로 쓴 글도 충분히 아름답고, 때로는 심금을 울린다. 버치는 한 기고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에 관한 규칙은 깨지라고 있는 겁니다. 좋은 책을 쓰기 위해 여러 초안들이 필요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기 위해 키보드 뒤에 하루 종일 앉아있을 필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