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TALK] (10) 겁쟁이 기자에게 보내는 편지

편지를 보낼 기회를 얻게 돼 영광입니다. 얼굴을 모르는 많은 동료들께 이야기를 건넨다는 것이 무척 떨리네요.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일을 하며 우리들은 수시로 이런 질문을 마주합니다. 그때 판단의 지침이 되어주는 것 중 하나가 언론윤리헌장일 텐데요. 9개의 조항 가운데 첫 2개에서 키워드를 뽑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실과 책임. 우리가 엇나가지 않게 지켜주는 이 단어들은 때로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고요. 한 명의 노동자로서 매일 부딪히는 질문들을 슬쩍 꺼내 보려고 합니다. 아주 소소하지만 중요한 것들 말이에요.

기자의 전화 울렁증

전화통을 붙들고 온종일 전화를 하는 게 다반사인데, 얘기를 나눠 보면 전화 울렁증이 있는 기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쿵덕쿵덕 가슴이 설레고, ‘이런 사람에게 전화 걸 수 있다니’마음 벅찬 기분이 올라오는 때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개의 경우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살짝 초조합니다. ‘상대방은 지금 무슨 상황일까’‘곧바로 통화를 거절하는 건 아닐까’…. 공무원이나 관공서 직원 등에게 문의할 사항이 있어 주말에 전화를 걸게 되면, 휴식을 방해하는 게 아닌지도 몹시 신경이 쓰입니다. 쉬는 날인 게 뻔한데 일을 시키게 되니까요.


이런 잡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을 마련해 두었습니다.(언론재단의 수습기자 교육에서 언급한 적도 있습니다.) 절대 넘겨짚으려 하지 말자, 상대방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그 자신 밖에 모른다, 어쩌면 기자의 전화, 바로 나 같은 기자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통화를 해 보면 느낌이 ‘팍’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곤 생각도 못한 사람이 중요한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경우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안다고 해서, 울렁증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바깥에서 보는 ‘기자’의 이미지란 피도 눈물도 없는 하이에나 같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모두 일상의 작고 큰 허들을 넘으며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보도 후 이어지는 질문들

“너처럼 하면 기사 하나도 못 내보내!” 혹시 데스크로부터 이런 피드백을 받아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일을 시작한 첫해에 여러 번 들었습니다. 취재가 충분한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데스크에게 털어놨거든요. 손을 털어 기사를 내보내고 좋은 피드백을 받아도 뭔가 찜찜하고 일이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취재 과정에서 때로 취재원에게 깊이 몰입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쓰며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고 나면 여파가 꽤 오래 갑니다. 기사를 내면 끝인 줄 알았는데 몇 년에 걸쳐 지난한 소송이 계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취재원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걱정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일할 때도 질문은 찾아옵니다. ‘책임져 주지도 않을 거면서, 나는 지금 나의 영달을 추구하거나 혹은 데스크로부터의 쪼임을 모면하기 위해 이 사람을 이용하고 있나?’하고요.


비판하는 기사를 쓴 경우는 또 어떤가요. 언론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쳐 놨다”같은 비난이 쏟아져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합니다.


이보다 힘든 건 내 안에서 들려오는 의심의 목소리입니다. ‘틀린 건 아닐까’,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사실 필연적인 일입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윤리헌장의 첫 번째 조항에 나와 있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데,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은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니니까요.


보도하는 시점에 내가 가진 조각이 전체 퍼즐에서 어느 부분을 차지하는지 우리는 많은 경우에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전체 퍼즐을 다 맞출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고요. 일단 내 조각을 꺼내놓고 보면 다른 기자들이 달려들어 다른 조각을 찾아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같이 퍼즐을 맞춰 나가고 있으니 우리는 회사를 불문하고 협력하고 있는 셈입니다. 타사 동료도 선배, 후배로 호칭하며 각별히 여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겠지요.

선의를 믿고 앞으로 앞으로

기본적으로 이 일이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가 진실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주저하는 마음은 오직 진실을 밝히겠다는 나의 선의를 믿고 돌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이것은 공동의 선의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 조각을 꺼내고 나면 다른 동료가 자신의 선의로 한 조각을 더할 것이다, 그렇게 더해 가다 보면 우리는 중간에 실수하기도 하고, 사건이 희한한 국면으로 흘러갈 때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이 일을 밀고 또 밀어 올려 어딘가로 보내야 한다, 진실에 가까운 방향으로, 정의에 가까운 방향으로.


이 일에는 저 같은 겁쟁이 기자도 필요하다는 얘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소심한 사람과 대범한 사람이 서로 보완하면서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게 이 업의 특성 같기도 합니다. 때로 어떤 기사는 안 내보내는 게 나을 때도 있습니다. 언론인이 지닐 덕목은 무모함 혹은 정의로운 자기 자신에 대한 도취가 아니라 더욱 철저한 검증, 많은 공부,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본 끝에도 누군가를 비판할 용기 같은 것일 테니까요.


오늘도 수많은 동료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윤리적 문제로 마음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응원을 보내며, 저 자신에게도 이 말을 남깁니다.


때로 비난이 쏟아지더라도, 내가 하는 일의 선의를 내가 믿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언론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각을 하는 기자들이 많이 있다고 꼭 알려주고 싶습니다. (방법을 아시는 분은 제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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