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성평등은 오는가

[이슈 인사이드 | 젠더]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모험하는 여자들의 아웃도어 커뮤니티’라는 수식어를 내세운 단체 우먼스베이스캠프(WBC)를 알게된 건 지난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공유된 게시물을 보고서였다. 평소 울창한 숲에서, 파도를 마주하는 해변에서, 자연을 침대 삼아 잠드는 삶을 갈망했지만 어쩐지 ‘나의 것’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아람단 활동을 하며 야영하는 법을 배웠던 것을 제외하곤, 백패킹 같은 아웃도어 활동은 안전 때문에라도 여성에겐 허락되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이동해 텐트를 치고, 파쿠르(자연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장애물을 활용해 자유롭게 움직이는 활동)를 배운다고?’ 내면의 모험심과 도전 정신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흔쾌히 참여를 결정했다. 행동거지가 조금만 거칠어도 ‘여자는 몸가짐이 조신해야지’ 같은 말을 듣기 일쑤. 점심시간이면 남자아이들에게 운동장을 빼앗겨 가장자리에서 고무줄놀이나 해야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더 이상 세상과 자연이 두렵지 않다. 동료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처음으로 혼자 텐트를 쳐봤으며, 어떤 지면(地面)을 골라 잠을 자야 하는지 습득하게 됐다. 싱크대 앞 앞치마 차림이 아니더라도, 광야에서 휴대용 버너로 능숙하게 투박한 한 끼를 요리할 수 있게 됐다. ‘여성’이라는 꽉 막힌 틀로 인해 충분히 누릴 수 없었던 벌판과 야생의 풍경을 되돌려 받은 기분이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여 산으로 들로 훌쩍 떠나는 삶에 빠져들었다.


여기까지라면 ‘여성 캐릭터의 성장 서사’ 정도의 행복한 결말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6월 뜬금없이 이 단체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졌다. 여당 원내대표가 여성가족부의 ‘성평등 문화 추진단 버터나이프크루(이하 버터나이프크루)’를 두고 ‘남녀 갈등의 원인인 과도한 페미니즘’ ‘관제 이데올로기’라 직격하면서다. WBC는 올해 버터나이프크루 4기에 선정됐다.


버터나이프크루는 성평등 문화 확산 등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모인 청년 팀에 100만~600만원 상당 지원금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인데, 그간 일·가정 양립이나 자기결정권, 여성 경력단절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청년들이 머리를 맞댔다. 일례로 이 사업을 통해 남성의 영역으로만 치부되던 차량 경정비 수업을 들은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정비소에서 무시 당하거나 덤터기 쓸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이것이 왜 ‘남녀 갈등의 원인’이란 말인가.


‘여성가족부 폐지’를 지지율 하락과 정권의 위기 상황마다 황금열쇠처럼 꺼내 드는 집권 여당에게 있어, 결혼과 출산의 전통적 역할에 매몰되기보다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가는 여성들은 ‘성평등의 적(敵)’인가. 작금의 성별 대립이, 여성들이 산으로 들로 떠나고, 경정비 수업을 받고, 지역에 페미니즘 네트워크를 만들고, 여성 예술인 조사활동을 벌이는 탓인가. 이 같은 활동은 ‘남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 관습적으로, 제도적으로, 관행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되어온 여성들의 경험과 데이터를 풍성하게 살리는 일이다.


집권 초기 ‘실세 중의 실세’인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남초 커뮤니티의 극단적 주장에 떠밀려 여가부 장관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장관은 하루 만에 해당 사업을 “전면 재검토한다”고 했다. 여성과 청년을 지원하는 1년 예산 4억5000만원 사업을 없애는데 총동원된 집권 여당 사령탑과 현직 장관의 정치, 참으로 소박하다. 성평등은 여성들을 들판에서 몰아낸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쫓겨난 여자들은 아기를 낳으러 과거의 집으로 돌아가기보다 또 다른 들판을 찾으러 떠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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