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게 없는지 탐색하면서 TV 리모컨을 열심히 누르다가,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을 목격하고 엄지손가락 운동을 멈췄다. 예능 속 유명 연예인들과 나란히 앉아 토크를 주고받던 사람. 출연자들은 그를 ‘단장님’이라 부르며 여느 방송인 대하듯 했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방송인 전현무, 가수 이찬원 등 방송에서 흔히 보는 인물들과 MC석에 앉아있던 사람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었다.
해당 방송은 SBS 예능 프로그램 ‘식자회담’으로, 최 회장은 ‘식자단장’이란 역할로 출연해 진행을 맡았다. 주제는 국가발전 프로젝트로 추진되는 한식의 세계화였는데 내겐 여러모로 어색하다 못해 이상했다. 단지 최 회장이 방송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던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국가발전을 왜 SK그룹 회장이 이끄는지, SK가 주제에 부합하는 경험이 있었는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알고보니 그 방송은 대한상공회의소 주도로 제작된 거였다. 대한상의 회장인 그가 국가발전을 위해 한식 산업화의 필요성을 알린다는 명목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그렇다해도 의아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대한상의의 설립 목적이 그새 국가발전으로 바뀌었나? 다 떠나서 왜 굳이 최 회장이 MC를 맡았을까? 배경은 이랬다. 대한상의는 최 회장의 기획으로 국가발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다양한 사업을 벌여왔는데, 앞서 이미 한 차례 SBS와 손잡고 방송 프로를 제작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최 회장이 다른 경제인들과 함께 공동 출연했지만 이번엔 단독으로 진행자 역할까지 맡았다. 식자회담에서는 그가 해외에서 어떤 상을 받았고, 국가사업을 유치하기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 공로와 업적을 세세히 짚으며 민망스러울 만큼 치켜세웠다. 게다가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출연했다는 설명과 달리, 대기업 총수의 면모를 부각하기도 했다. MC 전현무는 최 회장이 해외에서 어떤 메뉴를 먹는지 궁금해하고, 이찬원은 그의 말마다 감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전현무는 “곧 SK 광고 찍겠다?”라며 적나라한 멘트를 던졌다. 이쯤되니 SK가 식품 수출 사업에 진출할 구상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제지를 중심으로 해당 방송에 출연한 최 회장에 대한 용비어천가가 펼쳐졌다. 기존 대기업 회장의 틀을 깬 소탈하고 친근한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평가와 “번뜩이는 아이디어 제시는 물론 재치와 입담으로 녹화장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까지 톡톡히 했다는 후문”이라는 대목까지. 대한상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낀 기사들도 여럿이었다.
국가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민간기업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상품이 한식이라도 그렇지, 신산업에 진출해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빤한 속내를 어떻게 숨길 수 있을까. 국가발전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도 해석하는 이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국가가 발전하려면 적어도 사법부가 수감한 죄인을 경제에 이바지하라고 풀어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대기업의 번성이 국민을 배불린다는 주장도 이제 빛을 잃지 않았는가. 물론 재벌이야 아직도 자신들이 국민을 먹여 살리고, 국가를 발전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보도 기능을 가진 지상파방송사가 재벌의 인식과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 적극 홍보해주는 건 아니지 않는가. 재벌의 프로파간다를 퍼나르는 비둘기를 자처해선 안 된다. 날개를 누가 달아줬는지도 잊은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