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를 말하지 않는 사회

[이슈 인사이드 | 젠더]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지난달 29일, 참사가 일어나기 불과 세 시간 전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인근 도로를 차를 몰고 지나갔다. 꽤 싸늘한 늦가을 날씨에도 배를 시원하게 드러낸 상의를 입고 한껏 멋을 낸 거리의 젊은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배앓이는 안 하려나 몰라. 역시 젊음이 좋구나.’ 해사한 미소들에 얕은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10년만 어렸어도 오늘 같은 날 이태원에 갔다!”


조금만 더 어렸다면, 나는 정말로 그 군중 속에 있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3년 가까이 착용했던 속박 같은 마스크를 허공에 집어던지고, 가진 것 없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젊음을 예찬하며, 친구들과 오늘을 살고 있음을 자축하는 춤을 길거리에서 현란하게 췄을 것이다. 청춘은 원래 그러한 것이므로. 길고 긴 코로나 터널을 통과한 직후 맞이한 귀한 축제날이었으므로.


두통약을 먹고 깊게 잠든 탓에 다음날 아침 휴대폰에 쏟아진 알림을 뒤늦게 확인했다. “이태원 간 건 아니지?” “대체 무슨 일이래.” 걱정 섞인 연락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온갖 뉴스 속보가 간밤의 급박했던 순간을 타전하고 있었다. ‘149명(10월30일 아침 기준) 사망.’ 믿기지 않는 숫자 앞에 한동안 할 말을 잃은 채 서 있었다.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걸었던 골목이었다. 세계음식거리에 즐비한 이국적 음식을 즐기러. 친구들과 한바탕 수다를 떤 뒤 맥주를 마시러.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음악에 몸을 맡기러. 연인의 손을 잡고 근사한 데이트를 하러. 그토록 일상적이고 평범한 공간에서 156명이 사망했다. 길이 40m 폭 3.2m의 좁은 비탈길에서, 그것도 3년 만의 자유를 즐기기 위해 축제를 찾은 10대, 20대 보통의 청춘들이.


‘누구나’였을 수 있는 이 황망한 죽음 앞에, 무도한 일부는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느냐”는 의미의 신조어로 비극이 개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폭력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한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왜 핼러윈 같은 서양 명절을 기념하느라 인파 속에 뛰어 들었느냐”는, 전형적인 피해자 탓하기다. ‘구조적 책임’을 흐리고 개인의 행실과 불운에 잘못을 떠넘기는 비겁한 레토릭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브리핑에서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고 했다. ‘구조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말이다. 부처명의 ‘안전’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지경이다. 10만 인파가 모인 곳에 배치된 경력은 137명이 전부였다. 참사 몇 시간 전부터 SNS와 온라인에는 위험을 알리는 글이 올라오는 등 전조 현상이 뚜렷했으나, 경찰은 통행 제한 조치 등도 하지 않았다. 31일 책임 소재를 묻는 여론을 두고 이 장관은 ‘섣부른 예측이나 추측, 선동성 정치적 주장’으로 매도하기까지 한다.


구조적 진단과 책임을 따져 묻지 않는 사회에 개선의 여지는 존재할까.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대통령의 규정은 손쉽다. 그러나 더 평등한 세상을 향한 꿈을 가로막는다. ‘구조적 해결책은 없었다’는 진단은 간편하다. 그러나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한 신뢰 회복과 사회 안전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차단한다. 이태원 참사를 애도하기 위해 언론은 무엇을 말해야 할까. 그것은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던 여러분 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드러내고 의혹을 분명히 제기하는 것일 테다. 참사로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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