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에서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왜 일본은 사과를 하지 않는가?”다. 위안부나 강제징용 같은 과거사에 대해 왜 사과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한번도 안 한 건 아닌데”라고 답하면 가끔 “그럴 리가 없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한번도 사과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하다.
“사과는 했지만 그걸 부정할 만한 일본 정치인의 발언이나 태도 때문에 사과를 못 받은 것처럼 느낀다”라고 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사과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해”라고 되풀이하면 일본 쪽에서도 “이미 여러 번 했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실을 공유해야 대화할 수 있는데 한일 양국 언론은 사실을 알리는 역할을 제대로 못해왔다. 일본 언론도 과거사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어 양국의 인식 차는 커질 뿐이다.
한국 언론은 ‘진정한 사과’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일본이 ‘진정한 사과’를 안 했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일본이 사과하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한국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났을 때 “우리는 사과를 받고 싶을 뿐”이라며 호소하시는 걸 보고 할머니들이 사과를 받았다고 느낄 만한 사과는 어떤 것일까 고민한 적 있다. 진정한 사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나처럼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사람 입장에서 “일본이 여러 번 사과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반감을 살 수도 있어 조심스럽다. 내 앞에서 일본이 여러 번 사과한 걸 안다고 말한 한국 기자들도 그런 기사를 쓰면 ‘친일파’로 몰릴 수 있다며 소극적이다. 그런데 최근 출판된 이창위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책 <토착왜구와 죽창부대의 사이에서>에는 ‘일본 천황과 총리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 일지’라는 표가 실렸다.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부터 2018년 아키히토 천황에 이르기까지 53번의 사과를 정리한 표다. 내가 파악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
여러 번 사과했으니 이제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다. 한일 갈등의 원인을 서로 알아야 풀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생기지 않냐는 것이다. 얼마 전 만난 사람은 나한테 “저는 토착왜구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일본에 호의적이라는 의미로 농담 삼아 말한 것 같은데 불편했다. 이 책 제목에도 들어간 ‘토착왜구’라는 말은 일본에 대한 태도로 편가르기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저자 이창위 교수도 “야만적 어휘”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젊은 층이다. 최근 한국 언론 관계자와 카타르월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김민재 선수가 ‘일본이 부럽다’고 한 것에 놀랐다”고 말했는데 처음에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했다. 축구 선수의 유럽 진출에 관해 유럽파가 많은 일본이 부럽다는 발언이었는데 “솔직하게 일본이 부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놀랐다”는 것이다. 부럽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올 만큼 젊은 층은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진 듯하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을 곧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는 상황이다. 이제 일본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이웃나라로 편하게 보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언론 관계자가 ‘일본이 부럽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본은 여러 번 사과했다’는 기사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일맥상통한 문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