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의 시대 언론의 역할

[언론 다시보기]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2022년 8월, 여론조사기관인 유고브와 이코노미스트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43%가 10년 내 미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쩌다 이렇게 많은 미국인이 내전을 걱정하게 된 것일까?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 따르면 그 주된 원인은 미국 정당정치의 양극화에 있다. 특히 1990년대 공화당 지도부였던 뉴트 깅리치의 극단주의가 시작이었다. 깅리치는 민주당을 항상 부정적으로 묘사하도록 공화당원들을 독려했을 뿐만 아니라, 하원의장이 된 이후에는 아예 민주당과 ‘타협불가’를 방침으로 정했다.


깅리치 이후 극단주의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전략가 칼 로브로 이어졌다. 로브는 공화당의 승리전략으로 유동층을 내려놓고 지지자 집단의 집결에 당의 역량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에 맞서 민주당 역시 공화당과의 초당적 협력을 거부하면서 극단적 양극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양극화는 미국정치를 유지해 오던 두 가지 규범을 무너뜨렸다. 우선 상대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과 이해가 사라졌다. 더하여 상황을 고려하며 제도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이후 미국정치에선 에이미 추아가 지적하는 ‘정치적 부족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부족의 시대에 정치는 경쟁이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 되었다. ‘적대 정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적대 정치’가 ‘탈진실’ 경향과 결합했다는 데 있다. 적으로 규정된 세력에 대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적을 제거하고 몰아내는 일’이다. 진실의 여부, 정보의 가치는 이에 따라 결정된다. 실제 공화당 지지자들은 CNN 같은 진보적 매체들을, 민주당 지지자는 폭스뉴스 시청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이런 적대적 ‘탈진실’ 경향은 당연히 ‘반지성주의’ 경향을 띠었다.


트럼프는 이런 분위기에서 등장할 수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는 대통령 임기 동안 매일 평균 21건, 총 3만573건의 허위정보를 전했다. 하지만 지지자들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한 뒤 대선 결과에 불복하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의회에 난입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미국처럼, 2022년 대선 이후 우리 정치에서도 여당과 야당과의 협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정치는 외연의 확장보다는 각자의 지지층에게 매몰되어 양극화되고 있다. 개인적으론 우리 정치가 탈진실 경향 속에 적대하는 부족으로 분열된 미국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정치가 규범을 잃고 양극화될수록 입장이 다른 이들은 서로 마주하지 않는다. 이때 등을 진 세력 간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언론이다.


하지만 이런 역할이, 언론이 정파성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파성을 띤다더라도 상호 관용과 이해, 신중한 정보 전달을 바탕으로 입장이 갈등하는 이들을 공론장에서 만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론이 정치가 잃어버린 규범을 놓지 않는다면 정치도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탈진실’과 결합한 적대 정치의 시대, 언론의 새로운 규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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