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퇴사한 ‘전직 기자’를 만나거나 소식을 들을 때가 있다. 주변 반응은 대체로 두 종류인 것 같다. 개인과 회사 사정 등 여차여차하여 ‘나갈 만해서 나갔다’고 여기거나, ‘기자가 아닌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며 탄식하거나. 이병희 오디바이스 대표는 후자 쪽이었다. 회사 선배인 윤춘호 SBS 논설위원이 지난해 그를 인터뷰한 기사에서 “보도국을 맨 마지막까지 지킬 사람”으로 여겼다고 썼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20년 기자 생활을 하며 받은 상만 30개가 넘는, 그야말로 잘 나가는 기자였던 그가 좋은 직장을 내던지고 “백이면 백 다 말리는” 창업에 나선 건 어딘지 납득이 안 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기자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히려 오래 버티신 거네요.” 난데없게 느껴지는 그의 인생 경로 변경이 알고 보니 자신이 설계한 운명론에 의한 필연이었음을 알게 된 까닭이다.
애초에 딱 기자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본투비(타고난) 기자라 생각한 적도 없”다. 퇴사 전까지 탐사보도부 ‘끝까지 판다’ 팀에서 삼성 차명 부동산, 군(軍) 병원 불법 의료 실태 등을 파헤치며 기자상을 쓸어 담았던 그가 말이다. 실제로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기자 같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기자는 더 날카롭고 독해야 하는데 ‘넌 약간 기자 같지 않아’라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스스로 돌아보면 기자 생활을 스트레이트하게 기자의 전형대로 했다기보다 약간 하이브리드형 기자가 아니었나 싶어요. 기존에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른 관점에서 기사를 많이 본 것 같아요. 덕분에 재미있는 뉴스도 많이 나왔던 것 같고요.”
대학 때도 소위 언론고시 준비보다 각종 공모전과 아이디어 경진대회 참가로 바빴다. 대학 시절 경진대회 입상을 계기로 서비스 방식만 바꿔도 많은 부분이 개선된다는 걸 일찍이 깨달은 그는 기자가 된 뒤에도 틈틈이 특허를 내 개인 특허권 4개를 보유 중이다. 그런 그가 “언젠가 내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은 지체됐다. 어느덧 40대 중반이 된 그를 떠민 건 역설적으로 그 자신, 정확히는 과거의 자신이었다. 대학 때, 입사 초에 썼던 다이어리를 꺼내 보면서 “‘이걸 안 하면 결국 후회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일기는 제가 썼지만, 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툴(도구)이에요.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알 수 있고 뭔가를 결정할 때도 좋은 자료가 되는 것 같아요. 창업을 결정할 때도 2012년, 2013년에 썼던 일기장을 많이 봤어요. 왜냐면 두려웠으니까요. 두렵지만,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차원에서 자기 확신을 준 거죠. 제가 예전에 썼던 기록들이 저한테 얘기를 많이 해준 거예요.”
그렇게 2019년 말 결심을 굳히고 2020년 8월, 회사를 떠났다. 마침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던 시기였다. 아울러 “스타트업 붐이 끝난” 시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핑계 삼아 선택을 번복하고 싶진 않았다. 첫 사업은 잘 안 됐다. 아빠와 자녀의 특별한 시간을 추천해주는 라이프 플랫폼이었는데, 팬데믹 상황에서 성장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1년여 만에 사업 전환(피봇팅)을 하고 지난해 9월 오디오 어드바이스 플랫폼 ‘오디바이스’를 내놓았다.
오디바이스는 대학입시 고민 상담을 ‘선배’ 멘토와 1대1로 연결해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검증을 거쳐 등록된 대학생 멘토들이 입시 준비, 공부 방법과 관련해 비대면 상담을 해주고 멘토링 노트도 제공한다. 대학입시에서 정보 격차는 꽤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데, 수도권 이남만 가도 서울과의 정보 접근권 차이는 크게 벌어진다. 이 대표는 “동일한 능력과 의지를 가진 친구들에게 (멘토와의) 만남을 연결해주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기회로 갈 수 있다”고 봤고, 그래서 “시장이 지방에 있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지역에서 호응이 좋다.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오디바이스와 계약을 맺고 해당 지역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이용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주위에서 ‘대학생 선배’ 찾기도 쉽지 않은 지역에선 “단비 같은 서비스”라고 이 대표는 말했다.
대학생 멘토와 예비 수험생 멘티를 연결하는 상담 서비스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전문 입시컨설턴트 컨설팅과 학습 관련 심리상담 등도 제공할 계획이다. 이 대표는 “교육 격차라든지 학업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스타트업 대표 4년차. ‘SBS 기자 이병흽니다’ 한 마디면 부연 설명이 필요 없던 삶은 2020년 8월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은 “저의 존재와 저희 서비스에 대해 바닥부터 설명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계속 증명해야 투자도 받고 계약도 따낼 수 있다. 대표 포함 전 직원 8명이 그렇게 매일 고군분투해야 하는 생활이지만 그는 확신한다. “작은 부분에서 확실한 서비스를 제공하면 충분한 기업가치를 만들 수 있다”고. “우리 집 구석구석의 중고제품만 잘 연결해도 유니콘이 되는 시대인데, 우리가 가진 재능은 중고품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잘 연결시키면 우리는 유니콘이 안 될 수 있을까요.”
그는 아이디어북에 메모할 때 떠오르는 생각에 대한 답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다. 그중엔 “머무는 것만으로도 학생과 아이들의 잠재력이 커지는 공간을 만드는 꿈”이 있다. 좋은 공간에서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이 날개를 펼 수 있게 하는 일을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고, 이런 꿈을 실제로 구현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런 그림을 마음에 품었으니 40대 중반에 안정된 생활을 벗어나 “급변침”을 택할 수 있었던 거다. “사람들이 볼 때는 경로에서 너무 많이 벗어난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서 고생하는 것 같기도 하겠죠. 저는 매를 미리 맞았다고 생각해요. 운 좋게 SBS에서 정년퇴직했더라도 그 이후에 죽기까지 남은 삶이 굉장히 길기 때문에 그때 가서 고민할 거 미리 당겨서 했다, 빠듯하게 했다 생각합니다.”
기자로 일했던 경험이 큰 자산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기자 선배이자 퇴사 선배로서 후배들에 대한 멘토링을 부탁했다. 그는 “나와서 객관적으로 보니 알겠더라”며 “기자라는 사람들은 일을 정말 잘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특히 “동일한 일을 빨리 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도 했다. 그러니 괜한 자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고 그는 말했다. “자기가 얼마나 잘하는지, 내가 지금 가진 네트워크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이걸 잘 활용했을 때 얼마나 큰 가치를 만들 수 있는지 자각했으면 좋겠어요. 일부러 격려하거나 미화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생각보다 사회에서 이런 역량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렵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