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좋은 질문’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고민하다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첫째, 반대편을 실제로 아프게 하는 질문이 좋은 질문이다. 상대에게 1도 타격감이 없는 질문은 대체로, 상대방을 단순히 ‘사악하거나 탐욕스럽거나 멍청한’ 존재로 상정한다. 이러면 사실 질문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애초에 궁금한 게 없을 테니까.
둘째,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질문도 좋은 질문이 아니지만, 반대편만 아프게 하는 질문도 좋은 질문은 아니다. 우리편도 불편한 질문이 좋은 질문이다. 어떤 문제가 오래 해결되지 않고 심지어 격렬한 갈등을 수반하고 있다면, 양쪽의 논리가 일리가 있으며 그 나름의 도덕 관념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서로를 절멸시킬 게 아니라면, 일단은 물어서 들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대립하는 양쪽의 이야기를 듣고 알리는 게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고, 적어도 기자 지망생 때는 배우고 믿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언론은 어떤가. 건설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 수사를 보도하는 기사들을 보면, 보수 언론이나 경제지에서는 심지어 ‘단독’을 단 기사에서조차 노동조합의 의미 있는 반론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민주노총이 보수 언론의 취재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토록 오랫동안 핵심 당사자 취재를 포기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개된 적절한 반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반면 진보 언론에서는, 어쨌거나 업계의 중요한 이해당사자인 사업주 측의 고민을 좀처럼 들어보기 어렵다.
인공지능의 폐해로 흔히 ‘필터 버블’을 든다. 알고리즘이 선별해준, 이용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에 갇히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만약 종이신문으로 보수 언론이나 진보 언론만 읽는 시민이 있다면, 과연 그가 어떤 사안이든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대안을 고민할 수 있을까.
“안전 관련 신고 또는 외국인 불법고용 문제를 무기삼아 갈취를 일삼는 행태가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었다.” 경찰청 특별단속 중간결과 보도자료에 나오는 문장이다. 수사기관이 ‘갈취’라고 파악하는 행위의 전제에 이미 현존하는 두 가지 불법적 상황(안전, 미등록 외국인 고용)이 포함돼 있다. 어느 것도 한국사회가 오래도록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며, 후자는 인권 관점에서 논쟁적인 사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폭력이 불법이라는 당연한 말을 반복하는 것을 넘어서, 제조업과 함께 경제의 양대 축을 담당하는 건설산업의 이면을 근본부터 들여다보고 해법을 찾는 게 언론의 일 아닐까. 그러려면 노(勞)든 사(社)든 적어도 취재원에서 배제할 수는 없지 않을까.
건설현장 평균 연령이 53.1세라고 한다. 민주주의 정부가 특정 산업의 현대화를 노골적으로 방치하는 동안, 현장은 지옥도가 되었다. 노동조합이 다른 노동조합으로부터, 같은 노동자가 다른 외국인 노동자로부터 일자리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까지 왔다. 뒤늦게 나타나 한쪽 편만 드는 국가를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언론이 본연의 임무를 잘 해오고 있는지도 돌아볼 일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세상을 치유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저널리즘의 임무다(<미래의 저널리스트에게>). 조폭이 연루된 ‘노조’가 마치 민주노총 건설노조인 것처럼 사진을 내보내는 언론에 너무 과한 기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