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이용자는 디지털 기술이 발달할수록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종이신문부터 휴대전화를 통한 기사 읽기와 동영상 보기까지. 흔히 말하는 시장에서 공급되는 상품의 다양성과 이용자의 선택 다양성은 넘쳐난다. 종이신문의 경우, 복수의 경쟁지만 남아있는 강원과 부산을 제외하면, 적어도 광역별로 6개에서 21개까지 발행되고 있다. 여기에 각 시군에 있는 지역주간신문을 합치면, 상표 다양성은 가히 최고 수준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시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적정수준 공급하기 위해 독자적인 기사생산체계를 갖춘 일간신문이 1~2곳 정도 존재했다.
하지만 대다수 신문 기사는 절대 다양하지 않았다. 지난 6월초 한 광역단체에서 발행되는 지역일간신문과 지역주간신문을 비교할 기회가 있었다. 일간신문에 게재된 기사 중 자기 기사가 30%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 통신기사를 조금씩 변형하거나 아예 그대로 게재했고, 심지어 한 기초자치단체에서 외주(!)를 준 군수 인터뷰 기사는 복수의 신문이 홍보실에서 배포한 내용을 그대로 전재했다. 한복을 입은 해당 지자체 군수의 사진이 버젓이 신문마다 실렸다. 직접 사진을 촬영하는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한 군에서 발행되는 지역주간신문 3종의 내용 일치도는 10% 미만이었다. 쉽게 말해 일간신문은 통신기사나 지자체 보도자료를 베끼고 줄여 쓰고 있지만, 주간신문은 자기 기사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었다.
1930년대부터 음악산업의 중심이 클래식 연주장에서 음반으로 옮겨가던 때, 음악의 대중화를 연구했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대량생산에 대한 압박으로 창작할 여유조차 얻지 못한 음악가들이 기존 곡을 조금씩 변형하여 신곡을 내놓는 유사차별화 전략을 쓴다고 분석했다. 비슷한 듯 다르지만 하나의 모체에서 나온 여러 상품이 소비를 주도하면서, 시민을 우민화하고 금치산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지금 우리 지역신문을 분석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까? 분석을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지역신문마다 정부 광고 배당에서 불이익을 받는다고 아우성치고, 뉴스포털 입점에서 불이익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일부 지역일간신문과 지역주간신문은 분명 불이익을 받고 있고, 자본을 투자하여 생산한 기사를 포털에 헐값으로 넘기거나, 아예 공급할 기회조차 못 받는 것도 사실이다. 지역신문은 투자한 만큼 손실이 발생한다. 그렇더라도 포털에 탑재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수준의 ‘받아쓰기’도 못하는 지역신문을 유통하는 건 공해일 수 있다.
지역적 다양성은 상표 다양성과 내용 다양성이 함께 할 때 보장된다. 지역의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논의가 국가경쟁력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지원정책이 필요하다면, 최소한 북유럽에서처럼 정부광고와 신문지원 집행기준에 자기 기사 비율과 기사와 광고 분리 원칙만이라도 제대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의 언론정책은 공적 지원 영역을 축소하고 시장경쟁을 우선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타조처럼 머리만 숲에 가린 채 살려달라고 아우성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다가올 현실은 관행적으로 보호받던 제한적 시장경쟁이 아닌 완전경쟁일 것이다. 시장이라는 늪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또 어느 정도 자기상품을 생산할 때라야 줄여 쓰고 늘려서 쓸 수 있는 유사차별화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