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지난해 8월, 여수 안도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이야포 해변을 바라보던 할아버지. 얼굴에는 그늘이 비쳤고, 한동안 말이 없으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인터뷰에서는 믿기 어려운,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한국전쟁의 비극 ‘이야포 사건’…진상 규명은 제자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다시 제주도로 피난을 간 일곱 식구가 있습니다. 제주로 향하던 피난선은 통영을 지나 여수 안도에 머물렀죠. 취재진이 만난 할아버지도 그때 그 피난선에 있었습니다. 8월2일 저녁 여수에 도착한 피난선은 다음 날 오전 느닷없이 전투기로부터 폭격을 맞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할아버지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잃었죠. 누나와 남동생 이렇게 셋만 살아남은 할아버지는 이후 힘들고, 긴 세월을 버텨왔습니다. 누가, 왜 그들에게 폭격을 가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73년이 흘렀습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는 이 폭격으로 150여명이 희생된 사실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이야포 사건 이후 엿새 뒤, 인근 두룩여 해상에서 조기잡이 어민에게 가해진 전투기 폭격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직접적인 문서 부족으로 가해 주체를 미군 전투기로 추정하는 데 그쳤습니다. 16살에 피난선에 오른 이춘혁씨는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백발의 노인이 됐습니다. 두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지만 누가, 왜 폭격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죠. 부모와 여동생들을 한순간에 잃었지만 보상은커녕 사과와 위로도 받지 못해 평생의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73년 만에 찾은 미공군 폭격 기록
전쟁 속에서 이어진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 이것이 전쟁으로 인한 부수적 피해가 아닌 ‘전쟁범죄’의 참혹한 결과라면 미국과 한국 모두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증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당시 미군의 폭격 기록입니다. 미군의 각종 보고서가 보관된 미국국립문서보관청을 찾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취재진은 이곳에서 두 폭격의 실마리를 최초로 입수했습니다. 미5공군 항공기가 여수 항구와 철도를 폭격했다는 최종 임무보고서, 피난선이 폭격 당한 이야포 등을 목표로 한 미공군 일일임무보고서 그리고 폭격을 전후로 미공군 정찰대대가 여수 일대를 주 타깃으로 정찰한 지도와 ‘이야포 사건’ 당일, 250척의 낚싯배를 목격했다는 미공군 무전 기록까지 확보했습니다.
전쟁 속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기억해야 할 역사
1·2기 진화위에 접수된 미군 폭격 희생사건 규명 신청은 300건이 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건들이 관련 문서가 부족하다는 이유 등으로 불능 처리됐습니다. 그만큼 미군 문서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근리 사건’ 기록도 한국 언론사가 아닌 AP통신에서 찾은 것입니다. 물론 폭격의 증거를 찾았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닙니다. 미공군 문서를 토대로 이야포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는 침몰선 추정 선박을 인양하고, 야산에 묻혀있는 유골을 발굴하는 등 이전까지와 다른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너무너무 억울하잖아요.” 올해 8월, 이야포 사건 추모제에서 1년 만에 다시 만난 할아버지가 저희에게 했던 말입니다. 한국도 미국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밝혀야 하는 진실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기억 속에 사라지는 역사가 되지 않기 위해 여수MBC는 두 사건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미군 폭격 사건을 세상에 더 많이 알리고, 책임을 묻고, 나아가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해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