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 없는' 의료대란 피해자 보도... "재난보도준칙 위반"

SNS‧온라인에서 피해사례 무단수집
"인터넷에 올렸다고 보도에까지 동의 아냐"

정부의 의대증원 방침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파업을 이어가는 가운데 당사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피해사례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에서 사례를 무단으로 수집한 것인데, 인터넷에 공개된 정보라도 이런 보도는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고 재난보도준칙에도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온다.

25일 대구지역 대학병원 외래 진료 대기실에 진료가 지연된다는 안내문이 떠 있다. /연합뉴스

JTBC는 13일 자녀의 수술이 취소됐다는 사연을 당사자 허락 없이 보도했다. SNS에 올라온 환자의 영상 두 개와 사진 한 장을 1분 길이로 편집했다. 모자이크 처리는 했지만 출처 표시와 함께 계정명을 노출했다. 이 보도를 시작으로 방송사 두 곳을 비롯해 8개 언론이 같은 내용을 받아썼다.

당사자에게 삭제 요청을 받은 기자는 “허락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누구라도 도와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해시태그가 많이 달려 있어 공론화하고 싶다는 의지를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해시태그는 불특정 다수에게 게시글이 검색될 수 있게 하는 기능이다.

이 기자는 “기사가 나간 뒤 (당사자가) 의사에게 사과를 듣고 수술 날짜도 다시 잡혔다”며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했는데 기사가 나가게 돼 감사하다는 전화를 당일 저녁에 줬다. 공적인 역할로 오히려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기사는 삭제하지 않기로 합의했고, 동의 없는 기사화에 불쾌함을 호소한 SNS 게시글은 내려갔다.

뉴스1은 지난달 19일 수술이 취소됐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게시물을 동의 없이 기사로 옮겼다. 환자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었다. 병원 이름과 병명, 수술 부위 정보가 특정돼 환자가 누군지 노출됐다. 글쓴이는 병원에서 기사를 문제 삼는 듯해 두렵다며 기사 삭제를 요청했다.

뉴스1 기자는 “커뮤니티에서 SNS, SNS에서 기사로 이미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저도 인용했다”며 “신빙성이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기사를 본 당사자가 항의해 온 뒤에는 “병원명은 가려 달라고 해 다 수정했다”고 말했다. 이 사례를 쓴 다른 기사들은 모두 삭제됐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이미 SNS 등에 공개했으니 기사에 가져다 써도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딱 잘라서 그건 아니다. 위법성이 분명하다”며 “인터넷에 올렸다고 해서 언론에 보도되는 데까지 동의한 적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대란 피해자들이 같은 처지의 환자들과 정보를 교류하며 도움을 얻거나 정서적 지지를 구하는 등 애초 인터넷을 사용한 목적을 벗어나 병력과 같은 사적 정보를 언론에 무단으로 수집 당한 셈이다. 이 교수는 “익명으로 인용했다고 해도 특정한 정보로 주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다면 사생활 침해”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제정된 재난보도준칙에 어긋난다는 점도 문제다. 재난보도준칙은 ‘피해자 인권 보호’를 비중 있게 포함하고 있다. 제18조(피해자 보호)는 피해자와 가족의 “희망사항을 존중하고, 명예나 사생활, 심리적 안정 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취약한 상태에 놓인 피해자에게 또 한 번 불필요한 피해를 안기지 않기 위해서다.

재난보도준칙은 의료를 포함한 전기, 통신 등 국가기반체계의 마비도 재난으로 본다. 정부는 지난달 23일 보건의료 재난경보 단계를 가장 높은 ‘심각’으로 격상하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도 설치했다.

김언경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소장은 “2017년 미투 운동 때도 일반인들이 SNS에 올린 피해사례를 동의 없이 보도해 문제가 됐다”며 “SNS 인용보도에 대한 가이드라인에 정확한 내용이 없더라도 재난보도준칙의 취지와 원칙인 피해 최소화, 피해자 존중에 비춰 상식적으로 판단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또 “의정갈등은 단순한 의료개혁 이슈가 아니라 총선을 앞둔 정치적 다툼인데 피해자의 충격적이거나 절규하는 사례는 한쪽 세력을 비난하는 소재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며 “환자는 치료받던 병원을 계속 이용해야 하지만 원치 않은 기사화로 자기 생명을 담보한 의료진에게 밉보이거나 불필요한 갈등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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