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 KBS 사장 취임 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위기는 곧 기회다> 제목의 대외비 문건이 3월31일 MBC ‘스트레이트’ 보도를 통해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다.
△사장 제청 즉시 챙겨야 할 현안 △사장 취임 즉시 추진해야 할 사안 등 크게 두 가지 챕터로 구성된 이 문건엔 ‘임원, 자회사 사장, 감사, 국장급 직위는 가능한 우파 등용’ ‘이번 단체교섭은 주요 실·국장에 대한 임명동의제를 비롯한 독소조항들을 과감하게 폐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등이 언급됐다. 특히 ‘KBS 정상화’ ‘방송구조 개편(KBS 공중분해)’ 등의 이름으로 단계별 조직 장악 지침이 담겨있다. 문건의 상당 내용은 박민 사장 취임 직후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 개최, 국장 임명동의제 폐지 움직임 등으로 현실화되기도 했다.
해당 문건을 입수한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1일 기자회견을 열어 “지금까지 KBS는 이 문건에 따라 KBS를 망가뜨리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겨 온 것이 아닌지 강하게 의심된다”고 밝혔다. KBS본부는 “문건의 작성, 실행 경위 등 전반에 대한 철저한 사실 규명이 필요하다”며 “공영방송을 정권의 도구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 법적 대응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아 내겠다”고 했다.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 KBS는 해당 대외비 문건에 대해 “출처를 알 수 없고 KBS 경영진이나 간부들에게 보고되거나 공유된 사실이 전혀 없는 문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이어 KBS는 “근거 없는 내용을 보도한 MBC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며 정정보도 신청 등 대응에 나설 방침”이라며 “다른 언론사들도 허위 사실이 확대 재생산되지 않도록 보도를 자제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했다. 하지만 MBC 스트레이트 보도에 따르면 문건을 제보한 KBS 직원은 “고위급 간부 일부가 업무 참고용으로 공유하고 있는 문건”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박상현 언론노조 KBS본부장은 ‘경영진이나 간부들에게 보고되거나 공유된 사실이 전혀 없는 문건’이라는 사측의 주장을 즉각 반박했다. 박 본부장은 “확인 결과 이 문건은 실제로 국장급 직위가 하급자에게 참고하라며 건네는 등 사측 간부 사이에서 유통됐다”며 “평직원 중에도 이 문건을 열람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KBS본부는 2월29일 사측이 노조에 제시한 단협안이 문건 속 내용과 판박이라고 했다. 지난해 말 사측이 의견 청취 차원에서 KBS본부에 내놓은 직급 체계 개편안도 해당 문건에 그대로 들어가 있기도 하다. 박민 사장 등 경영진이 해당 문건 속 시나리오대로 작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KBS본부가 강하게 의심하는 이유다.
KBS본부가 입수한 문제의 문건엔 “단체협약 무협약 상태까지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사측에서 단체협약의 채무적 효력(조합비 공제 협조)을 지렛대(볼모)삼아 단체교섭의 주도권을 행사할 필요가 있음” “임명동의 대상인 보도국장 등 5명은 사장 의지대로 임명하되, 임명동의를 받지 못할 경우 단체협약을 무시하고 발령을 강행하거나, 선임부장으로 발령내고 직무대행 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고려할만 함” 등이 명시돼 있다.
이에 대해 KBS본부는 “사측이 조합에 제시한 2024 단협 개정안을 보면, 사측은 주요 국장의 임명동의제와 본부장·총국장 중간평가에 대한 조항을 아예 통째로 덜어냈다”며 “긴급한 사안에 대해 개최하도록 돼 있는 임시 공방위에 대해선 안건 협의를 필수로 해 사실상 무력화 하고, 프로그램 개편과 관련해 조합의 요구 시 설명하도록 돼 있는 단협 조항은 일방 통보로 수정하는 등 공정방송을 위한 조치들을 대거 손보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KBS본부는 해당 문건이 “KBS 문서 양식이 아니”라고 전제하면서도 내부 인력이 아니라면 파악하기 힘든 KBS의 내밀한 정보가 들어있어 문건 작성자 중엔 내부 조력자들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박 본부장은 “문건엔 지난해 8월 수신료 현황이 언급이 되어있는데 보통 수신료 데이터가 한 달 뒤에 나간다. 일단 그해 9월 말에 작성을 한 거 같다”며 “지난해 10월 김의철 전 KBS 사장의 가처분 결과도 나와 있어 작성에 한 달 이상 걸리지 않았나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해당 대외비 문서엔 “단기적으로는 ‘KBS 정상화(파괴적 혁신)’, 중기적으로는 ‘방송구조 개편(KBS 공중분해)’ 개편 예상”이라고 적시돼 있다. KBS 정상화 주요 내용으로 “민주노총 언론노조 KBS 본부 중심의 노영방송 체제 단절”, 방송구조 개편엔 “현행 KBS 체제를 1공영, 1민영 등으로 방송구조 개편” “2TV는 민영화” 등이 제시됐다. 그러면서 “KBS 정상화는 사장의 영역으로 통제 가능하지만, 방송 구조 개편은 사장의 영역을 벗어나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많을 것”이라고 언급됐다.
윤창현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이 문건이 그저 KBS 내부에서 알아서 작성된 건 아니라고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다”며 2010년 이명박 정부 때 국정원이 만든 것으로 밝혀진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문건을 언급했다.
윤 위원장은 “(국정원 문건은) MBC 장악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아예 돌이킬 수 없도록 KBS 공중분해를 직접 언급하고 있어 더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어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떠오를 즈음 언론계 친윤 그룹이 중심이 되어 국민의힘 미디어특위 등을 주최로 여러 차례 토론회를 했는데 ‘2TV 민영화’ ‘수신료 문제를 건드려야 장악 가능하다’ 등 그곳에서 나온 마구잡이 발언이 문건에 종합되어 있다”며 “2010년 문건이 국정원에서 작성되었듯 권력 핵심의 의지가 아니고는 비슷한 사고를 그대로 드러낼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KBS본부는 문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고발 조치, 수사 의뢰 등 법률적 대응을 검토 중이다. KBS본부는 기자회견문에서 “이 문건에는 방송법과 근로기준법 등 현행 법령을 명백히 위반한 내용을 여럿 담고 있다”며 “공영방송의 가치를 정면으로 훼손하고 KBS 파괴를 책동한 문건 작성자, 문건 작성에 협력한 KBS 간부들과 외부 세력, 이 지침을 최종적으로 실행한 낙하산 박민에게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