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당시 프로이센에서 계몽운동을 대변하던 ‘베를린 월보’를 통해 ‘계몽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제기됐다. 이듬해 이 잡지에 자주 기고하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란 글을 게재했다.
칸트는 “계몽이란 다른 사람의 안내 없이는 자신이 이해한 바를 쓰지 못하는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답한다. 칸트는 당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삶에서, 더하여 공동체의 삶에서 중요한 사안에 관한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미루고 있다고 보았다. 만약 그 판단의 대상이 ‘공공의 일’이라면 정치 엘리트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라 볼 수 있다.
칸트는 이런 일이 평범한 대다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이해한 바를 쓸 해결책과 용기가 없어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칸트는 이 답변에서 철학, 아니 근대의 역사에 남을 명언을 남긴다. “이것이 계몽의 모토다. 과감히 현명해져라! 스스로 이해한 바를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그러면서 칸트는 계몽과 관련해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조언을 남긴다. 우선 현실적으로 각 개인이 스스로 계몽하는 일은 정말 어렵기에 공중(the public)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계몽은 다른 이들과 함께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일, 집단적 성숙이다. 이 집단적 성숙에 필요한 조건은 서로 마음껏 소통할 수 있는 자유다.
둘째, 이성의 사적 사용과 공적 사용을 구분해야 한다. 그럼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성의 사적 사용은 누군가가 자신의 위치만을 고려하며 이성을 쓰는 일을 의미한다. 세금공무원은 부당한 세금이라도 “논쟁하지 말고, 세금을 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이성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반면 이성을 공적으로 쓰는 이는 다른 이들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고려한다. 칸트는 이런 이성의 공적 사용의 방식의 예로 글쓰기를 든다. 공적으로 글을 쓴다고 할 때, 우리는 늘 타자의 평가와 비판을 의식한다. 이런 의식은 글쓰기를 보다 객관적으로 만들고, 타자의 다른 입장을 고려할 기회를 준다.
이런 칸트의 주장은 근대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도 설득력이 있다.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는 ‘여론과 군중’에서 공중은 함께 신문을 읽는 사람들에서 탄생한 집단임을 밝힌다.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공공사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는 다수가 공중이란 집단으로 변모했다.
더하여 반론을 듣는 언론의 임무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방식에도 부합한다. 물론 언론 매체 역시 특정 입장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입장의 언론 매체가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정보를 얻는 이들은 다양한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중의 형성에 언론의 자유는 핵심적 요소다.
이렇게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22대 총선 선거방송심의위원회 때문이다. 22대 총선 선방위는 중징계에 해당하는 총 30건의 법정제재를 의결했다. 18대부터 21대 총선 선방위가 의결한 법정제재가 18건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남발이라 볼 수 있다.
가장 높은 수위의 ‘관계자 징계’는 더 심하다. 22대 총선 선방위가 의결한 관계자 징계는 14건이었는데, 18대부터 21대 총선 선방위에선 단 1건에 불과했다. ‘관계자 징계’는 담당자를 징계할 뿐만 아니라 방송평가에도 높은 벌점이 부과된다.
22대 총선 선방위는 권력 친화적인 편파적 위원 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의결 내용은 더욱 어이가 없다. 바이든-날리면 사태 이후 권력에 찍혔던 MBC엔 제재 폭탄이 쏟아졌다. 선거와 관련 없는 내용도 제재 대상이 되었는데, 심지어 SBS는 ‘김건희 특검’에 ‘여사’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행정지도’를 받았다. 선방위는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권력비판적 언론을 향해 이성의 사적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를 돌아보면 계몽의 대상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시민의식의 성숙과 함께 계몽의 시대는 끝났다고 여겼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땅에서 계몽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계몽의 대상은 시민이 아니라 권력과 그 주변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