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1일은 내가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날이다. 기나긴 박정희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서울의 봄’이 움트고 있었다. 그러나 따사로운 봄볕 속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12·12 쿠데타는 어둠의 징조였다.
가냘픈 봄볕은 곧바로 혹독한 북풍에 밀려났다. 남녘땅 광주에서 일어난 항쟁을 총칼로 진압한 권력의 폭압은 치 떨리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전두환 신군부는 대한민국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언론을 장악해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전두환 신군부는 허문도의 주문(呪文)에 따라 언론장악에 나섰다. 전두환은 희대의 ‘언론학살’을 실행에 옮겼다.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기 위한 ‘K-공작계획’은 언론학살 실행 계획 중 하나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눈엣가시였던 비판적 언론인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다. 김태홍 회장을 중심으로 한 한국기자협회 집행부는 검열철폐를 내걸고 제작거부 운동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사전검열로 광주항쟁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기협 간부들은 모두 구속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재판을 받았고 기자협회는 무력화됐다.
전두환은 언론사 통폐합과 언론인 강제 해직, 보도지침 하달 등을 차근차근 시행해 나갔다. 그야말로 ‘언론학살’이나 다름없었다. 종합일간지는 조간과 석간 각각 3개사만 남겨놓았다. 제작거부에 참여하는 등 비판적 언론인 1000여명을 언론계에서 쫓아냈다.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은 매일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려 보도를 통제했다. 정부가 신문사의 등록을 취소할 수 있게 한 언론기본법으로 언론을 옭아맸다.
전두환 정권 중반 들어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학살’ 당한 언론은 시위 사실조차 보도하지 않는 등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의 ‘당근과 채찍’ 정책도 언론을 길들이는 데 한몫했다. 언론은 ‘권력의 시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언론은 시민의 외면을 받았고 언론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쳤다. ‘제도언론’이라는 용어가 요즘의 ‘기레기’라는 말처럼 언론을 일컫는 멸칭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기자협회는 조직을 다시 추스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나는 기자협회보에 자조 섞인 ‘기자론’을 기고했다. 한자어로 구성한 기자론은 당시 조그만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기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는 짧은 글이었다. ‘技者’(보도자료를 베껴쓰는 기술자), ‘旗者’(깃발을 들고 다니는 자), ‘飢者’(배고픈 자), ‘奇者’(이상한 자), ‘妓者’(기생같은 자), ‘棄者’(세상도 포기한 자) 등으로 기자사회를 풍자했다. 당시의 절망감이 그대로 표출된 글이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신문사 편집국 서무 책상에 보도지침을 모아둔 서류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편집부 기자였기 때문에 3일에 한 번씩 철야근무를 해야 했다. 최종판을 마감한 뒤 보도지침 서류를 복사했다. 복사본을 대학시절 친구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활동가에게 전해주었다. 보도지침은 1986년 ‘말’지 특집호를 통해 폭로돼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말’지는 강제해직된 기자들의 모임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발행한 ‘불법 월간지’였다.
보도지침은 시시콜콜한 지시사항이 담겨 여론조작 의도를 그대로 드러냈다. 가장 많은 지침은 ‘보도불가’였다. 야당 인사의 실명 및 사진은 쓰지 못하게 해 ‘재야인사’로 통칭됐고 직선제 개헌요구는 ‘현안’이라는 우회적 표현을 써야 했다. 학생시위는 화염병 투척이나 적군파식 수법 등으로 매도됐다. 경찰의 야만적 성고문은 ‘운동권 학생들은 성을 혁명도구화한다’는 공안당국의 발표로 둔갑됐다. 물가인상을 ‘물가합리화’로 쓰라는 지침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보도지침 사건으로 나는 김태홍·신홍범 선배와 함께 구속돼 재판을 받았다.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한달여 동안 물리적 폭력에 시달린 뒤였다. 재판은 국내외의 커다란 관심 속에 진행됐다. 구속 6개월만인 1987년 6월3일, 6·10시민항쟁이 타오르던 시점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재판은 이후 정권이 세 차례 바뀐 뒤 9년만인 1995년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막을 내렸다.
당시 언론계에서는 언론민주화 기치를 내걸고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 실상을 밝혀내고 반성의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자협회보는 권언유착의 청산 등 언론민주화와 촌지거부 등 자정운동을 벌였다. 나는 기자협회보에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현주소’를 연재했다. 독재정권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행적을 파헤치는 기획기사였다. 언론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김일평’이라는 익명으로 게재했다가 나중에 본명을 밝혔다.
1987년 6·10시민항쟁으로 한국사회가 민주화하면서 언론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민주화 과정에서 절대권력이 물러나고 권력 공백이 생겨난 틈을 타 언론이 권력화하기 시작했다. ‘언론권력’이란 말이 자연스레 등장했다. 독재시절에는 정치권력이 주도하여 언론을 파트너로 끌어들였다면 이제는 언론권력이 스스로 정치권력을 선발하겠다고 나섰다고나 할까. 오죽하면 ‘언론사주들이 모여 대통령을 뽑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비아냥거림마저 나왔다.
일부 언론인과 정치인의 유착 의혹도 널리 퍼졌다. 나는 1992년 기자협회장에 당선됐다. 당시에는 공정보도가 주요 관심사였다. 언론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선거보도를 감시하는 일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당시 정치부 기자들 중에 ‘YS장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자협회보는 한 언론사 간부가 정치부 기자들의 성향을 분석하여 상도동에 보고한 문서를 입수하여 ‘YS장학생 실재’라는 기사로 보도했다. 언론계 관심이 집중됐다.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신문업계는 무한경쟁 체제로 들어섰다. 신문사들은 무가지를 마구 찍어내면서 유통시장을 어지럽혔다. 이로 인해 살인사건까지 일어났다. 언론보도를 감시하고 신문시장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언론개혁’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뜻을 같이하는 언론인들이 모여 언론개혁시민연대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기자협회, 언론노련, PD연합회 등 언론단체와 민주노총, 한국노총,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19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를 결성했다. “언론은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선언으로 유명한 김중배 선생을 상임대표로 모셨다. 나는 사무총장을 맡았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언론관련법 제·개정 운동과 미디어교육운동, 언론피해구제운동 등을 펼쳤다.
언론계는 현재 커다란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혁명은 언론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하버마스가 공론장이론을 수정할 만큼 혁명적 변화이다. 그러나 보도의 정확성과 공정성 등 민주언론의 근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론의 신뢰도 바닥을 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언론과 권력의 갈등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정치권력의 공영방송 장악 시도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기자협회와 기자들이 민주언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심사숙고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