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뽕은 향정신성의약품이다. 마약류다. 필로폰, 메스암페타민, 빙두, 뽕으로도 불린다. 가장 많은 사람이 쓰고, 가장 많이 거래되는 마약. 이 물량을 조절해 가격을 정할 수 있는 히로뽕 유통 피라미드 꼭짓점의 소수를 ‘마약왕’이라 해두자. 법원을 출입하던 2021년, 전현진 경향신문 기자는 현실의 마약왕을 처음 봤다. 그는 8월22일 본보와 인터뷰에서 “이전까진 저도 영화에서 본 이미지들이 있었다”고 했다. “막상 재판을 보니 너무나 평범해서, 증인 신문을 온 사람들도 사우나에서 볼 법한 모습이라 오히려 인상적이더라고요.” 이 의외의 순간이 그의 논픽션 저작 <뽕의 계보>의 시작이었다.
책은 마약왕들의 생애를 통해 국내 히로뽕 유통의 역사를 망라한다. 크게 1~3부, 작게는 25개 화로 구성된 책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탄생된 히로뽕이 한국에 뿌리내린 1980년대 이전까지 역사(1부), 198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현 히로뽕 비즈니스 세계의 틀을 갖추게 한 주요 사건(2부), 현재까지 히로뽕 비즈니스의 모습(3부)을 아우르며 ‘점’의 사건을 이어 ‘계보’를 그려나간다. 흔히 영화·드라마 속에서 ‘약쟁이’와 ‘사이코패스’ 사이 어디쯤으로 표현되는 마약왕 이야기가 아니라 “히로뽕으로 들여다보는 한국의 현대사”를 사람 이야기로 풀어낸 경우다.
‘한중일’ 언론보도와 논문, 책, 기관발 보고서 등을 꼼꼼히 살피고 판매업자를 만났지만 부족했다. 무조건 상선(공급책)을 만나야 했다. “1년 넘게 봐온 재판을 토대로 쓴 원고로 2022년 하반기엔 공모전 수상도 했지만 이후로도 1년 가까이” 제자리걸음이었다. 주변 취재, 사전 조사를 이어가며 꾸준히 교도소에 편지를 보내 소개를 받았다. 2023년 4~6월 거물급 한두 명이 재판을 마쳤거나 출소를 하며 물꼬가 트였다. “만나고 나면 소개 해주고” “연결을 해줘서” “그 업계에서 모르면 안 되는 수준”과 만남이 여럿 성사됐다. 매번 “1번이 누구인지” “언제 약을 처음 접했는지” “후회는 없는지” 질문했다. 판결문을 숙지해 ‘툭툭’ 튀어나오는 인물을 캐치하고, 표로 정리한 이름을 보여주며 평판을 확인했다.
그렇게 총 42명을 취재했다. 변호사, 경찰, 검사 등 12명을 빼면 모두 히로뽕 비즈니스 전·현직자였다. 1명을 빼면 교도소 접견실, 카페, 그들의 집에서 모두 직접 봤다. 13명과 주고받은 옥중서신만 수백 페이지다. “자주 뵌 분이 곤지암 집으로 오라고 하셨는데 거기가 업계 ‘사랑방’이었거든요. 좀 걱정됐죠(웃음). 와이프와 친구들에게 몇 시까지 연락 없으면 부탁한다 말 해두고, 음료수 먹지마라 얘길 듣고 그랬네요. 막상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들은 왜 답을 해준 걸까. “아니라고 해도 ‘드라마틱한 자기 삶에 대해 자서전을 쓴다’고 받아들인 분들이 꽤 있었고요. 기본적으로 스스로 경제 사범이라고 생각하니까 죄책감도 적고 거리낌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수감자들에겐 편지가 일과 중 아주 큰 부분이라던데 무시하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주변 동생 사연도 보라며 동봉해 편지를 보내오기도 하고요.”
이 과정은 직업물, 실화소재 스토리 기획사 팩트스토리와 종합일간지 경향신문의 독특한 협업 결과물이기도 하다. 수익이 생기면 양사가 절반씩 나눈다. 대신 팩트스토리는 기획과 영상화 등 콘텐츠 개발을 지원하고, 경향신문은 소속 기자에게 회사업무와 별개로 취재시간을 보장해주는 게 큰 틀이다. 기자는 관심사를 취재해 책을 낼 수 있고 추후 회사로부터 격려금을 받을 수도 있다. 이 협업과 소속 부서 데스크의 협조 아래 2022년 8월 뉴콘텐츠팀 발령 후 본격 ‘일’과 ‘책’을 병행하는 방식이 가능했다. 현재 영상제작사와 영상화 논의도 진행 중이다.
‘일본 약학의 아버지’가 우연히 개발한 히로뽕은 전쟁 시기 각성제로 쓰이다 일본 사회에 퍼졌고 단속·제재 움직임 속에 한국을 거쳐 중국, 아시아 전역으로 옮겨갔다. 시대마다 새로 탄생한 마약왕을 거친 끝에 최근엔 텔레그램 판매 시대를 맞았다. 더 이상 실명이 알려진 ‘마약왕’은 새로 등장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뽕의 계보에는 결코 사람이 남지 않았”고, “살아남은 것은 히로뽕뿐”이란 사실이다. 한때 마약왕 1936년생 김동일은 가족, 친지 없는 말년을 보내다 2023년 간암 투병 중 숨졌다고 책(25화)은 적는다.
중국과 일본 체류 경험이 있는 전현진 기자는 2012년 뉴스앤조이, 2015년 문화일보를 거쳐 2018년부터 경향신문에서 일해왔다. 사건팀, 토요판팀을 거쳐 법원을 출입하다 뉴콘텐츠팀에 몸담았고 현재 사회부에서 바이스를 맡고 있다. 내러티브 기사에 관심 가져오며 긴 글을 꾸준히 써왔고, 기사연구회 활동, 공저 인터뷰집 <논픽션 글쓰기 전설들>에도 참여했다. “약속도 했는데 여유를 부리다 김동일이란 분과 인터뷰를 못한 게 아쉬워요. ‘다 한 줄 알았는데 그때 취재할 게 많았다. 지금 다 돌아가셨다’는 얘길 예전 인터뷰 때 들었는데 몸소 깨우쳤어요. 첫 단행본이라 여러 고민을 했는데 다음엔 활자 매체 자체로 깊은 울림을 주는 그런 책을 써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