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심의민원 사주’ 의혹을 익명으로 신고한 직원이 스스로 신원을 드러냈다. 류 위원장의 비위 의혹을 조사한 국민권익위원회가 결론 내리기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에서, 신고자를 찾으려는 경찰의 잇단 압수수색 등으로 주변 동료들이 겪는 고통이 중단되길 바란다는 이유에서다. 신고자는 당당히 나설 테니 류 위원장도 같이 조사해 달라고 요구했다.
방심위 직원인 탁동삼 전 확산방지팀장은 25일 서울시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류 위원장의 민원사주 의혹을 제기한 신고자라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변호사를 통해 권익위에 비실명으로 류 위원장의 이해충돌 의혹을 신고한 지 9개월 만이다. 당시 신고는 김준희 방심위 노조위원장, 지경규 사무국장과 함께 이뤄졌다.
“오늘처럼 신분을 드러내는 날이 없기를 바랐다”며 심경을 드러낸 탁 전 팀장은 “공익신고 결과 남은 것은 방심위 ‘셀프조사’와 두 번에 걸친 압수수색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신고에 도움을 준 정황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직원들을 피의자로 압수수색하기까지 했다”며 “수사기관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방법은 본인이 아닌 주변인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신고자임을 스스로 밝힌 이유를 설명했다.
권익위는 류 위원장이 이해충돌방지법을 위반했는지 판단하기 어려우니 자율적으로 처리하라는 취지로 7월 사건을 방심위에 송부한 상태다. 서울경찰청은 민원인들의 정보를 유출했다며 누가 신고자인지 찾으려 1월과 이달 초 방심위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두 번째 압수수색 때는 직원들 여럿을 이미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 피의자로 입건한 상태였다.
탁 전 팀장은 “당당히 신분을 밝히고 조사에 임하겠다”며 대신 “저와 함께 류희림씨의 민원사주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수사해 주시기 요청한다”고 말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과 새언론포럼 등 언론단체들은 민원을 제기할 뜻이 없던 이들을 시켜 ‘가짜민원’을 넣게 했다며 류 위원장을 방심위에 대한 업무방해 혐의로 1월 고발했다. 하지만 서울 양천경찰서는 고발인 조사만 몇 차례 진행했을 뿐 여태 수사에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신고자들은 ‘직업인으로서 양심’과 ‘동료와 회사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류 위원장을 신고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김준희 노조위원장은 “최근 내부망에 회사 생활이 지옥 같다는 게시글이 올라와 서로 위로하는 댓글이 달렸다”며 “류희림씨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직원이 자괴감에 고통받고 있다. 오늘 신분을 공개하는 이유는 애초 공익신고를 한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대리신고를 맡았던 박은선 변호사는 “권익위의 어떤 담당자가 조사를 맡아도 저는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며 “이 정도의 증거가 있는 사건들은 2주 만에도 처리가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익위가 7개월을 끌었는데 결국 정당한 이유 설명도 없이 ‘모르겠으니 방심위에서 알아서 하라’는 수준”이라며 “신고자 처지에서는 황당하고 기막힌 것”이라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방심위에서 지인 3명의 이름을 빌려 민원 17건을 넣었다가 파면해고된 직원의 징계가 정당하다는 2019년 판결을 예로 들기도 했다. 당시 법원이 방심위 업무의 핵심 가치를 공정성으로 인정했다며 “류 위원장의 민원사주는 이런 공정성을 크게 훼손하는 행위로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되는 비위”라는 것이다.
류 위원장은 지난해 9월 가족과 지인, 전 직장 동료 등에게 시켜 최소 40명이 오탈자까지 같은 심의민원 104건을 내게 한 의혹을 받는다. 방심위는 이 민원을 바탕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부산저축은행 수사무마 의혹’을 보도한 MBC 등 4개 방송사에 과징금 1억4000만원을 부과했다.
국회는 30일 청문회를 열고 류 위원장의 쌍둥이 동생 류희목씨를 비롯해 민원제기 사주를 받았다고 의심되는 6명 등 모두 30명을 증인으로 불러 의혹의 실체를 추궁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