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골프 주역 '세리 키즈'의 감동적인 벙커샷

[박종민의 K-스포츠랩]

2016년 10월 인천 영종도 스카이72 골프장(현 클럽72) 연습 그린에서 홀로 남아 퍼트 훈련을 하던 김효주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그가 출전했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국내 대회 KEB하나은행 챔피언십은 ‘골프 전설’ 박세리의 은퇴 무대이기도 했다. 퍼트 연습을 끝내고 기자와 만난 김효주는 “멋있었고, 지금도 멋있는 분이, 멋있게 은퇴하시는 걸 보니 정말 존경스럽다”고 필드를 떠나는 전설에게 경의를 표했다.

김효주가 22일(현지 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멘로파크 샤론 하이츠 골프&컨트리클럽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포티넷 파운더스컵 최종 라운드 3번 홀에서 티샷하고 있다. 김효주는 최종 합계 16언더파 272타로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을 차지하며 투어 통산 8승을 달성했다. /AP·뉴시스

김효주는 ‘세리 키즈’ 세대의 막내다. 1977년생인 박세리의 전성기를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세리 키즈는 1986년생 지은희, 1987년생 최나연, 1988년생 박인비, 신지애, 이보미, 김하늘, 김인경, 1989년생 양희영, 1990년생 유소연, 최운정, 1992년생 장하나, 1993년생 김세영, 박성현, 이미향, 1994년생 전인지, 1995년생 김효주, 고진영 정도다.

세리 키즈는 박세리, 김미현, 박지은 등 LPGA 진출 1세대보다 훨씬 두꺼운 선수층을 자랑하며 화력도 남달랐다. 세리 키즈인 태극낭자들은 2015년과 2017년, 2019년 LPGA 투어에서 15승씩을 합작했다. 15승은 역대 단일 시즌 최다 합작 승수로 남아 있다. 2010년 신지애를 시작으로 2013년과 2015년 박인비, 2017년 유소연, 박성현, 2019년 고진영 등이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에 올랐고, 김효주는 그 십수 년 동안 정상권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여자골프는 2020년부터 긴 슬럼프에 빠지며 그해 7승, 2021년 7승, 2022년 4승, 2023년 5승, 2024년 3승을 합작하는 데 그쳤지만, 지난해 6승을 올리며 반등했다. 그 중심에 선 게 바로 김효주를 필두로 김세영, 이미향까지 30대가 된 ‘세리 키즈’다. 20대 때 여러 차례 우승하며 K-골프의 위상을 드높였던 이들의 선전은 무척이나 반갑고 감동스럽다. 모두 기자가 애정을 가지고 과거 여러 차례 인터뷰를 했던 선수들이다.

한국 여자골프의 최근 LPGA 3승은 이들이 쌓았다. 김세영은 지난해 10월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 이미향은 이달 초 블루베이 LPGA, 김효주는 23일 끝난 포티넷 파운더스컵에서 각각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우승의 순도는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높을 수 있다. 2010년대 LPGA 투어와 지금의 LPGA 투어는 꽤나 다르다. 세계적인 교습가인 고덕호 골프 해설위원은 전화 통화에서 “외국 선수들의 연습량이 한국 선수들만큼 많아졌다. 한국 선수들의 강점은 당초 열정, 집념 같은 것들인데 초창기부터 한국 선수들이 해오던 라운드 후 연습 루틴 등을 외국 선수들도 많이 따라 하고 있다. 그런 게 오래 이어지다 보니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며 투어가 상향평준화됐다고 분석했다. LPGA 투어에서 활약 중인 유해란 역시 같은 얘기를 했다. 이른바 ‘학습 효과’다. 교육열이 높기로 소문난 한국에서 꿈나무 골퍼들이 박세리 세대처럼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세계 정상에 선 과정을 타국 선수들도 벤치마킹해 실력을 향상시켜 온 것이다.

상향평준화된 투어에서 적지 않은 30대 나이에 이룬 우승들이라 의미는 더욱 남다르다. 여자골프 선수들의 최전성기 나이는 흔히 골프채를 잡기 시작한 후 구력 10년 안팎쯤 되는 20대 초중반이다. 33세 이미향은 2017년 7월 스코틀랜드 오픈 이후 약 8년 8개월 만에, 동갑내기 김세영은 2020년 11월 펠리컨 챔피언십 이후 약 5년 만에 LPGA 대회 정상에 섰다.

‘멘탈 스포츠’인 골프에서 오랜 공백을 딛고 우승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입스(Yips)’가 온 선수들은 사실상 재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클럽 교체나 스윙 교정, 캐디 교체 등에 의해서도 선수가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타이거 우즈의 2019년 마스터스 우승이나 리디아 고의 2021년 롯데 챔피언십 우승은 기적에 가까운 반전이었다. 반면 2010년대 한국 여자골프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박성현, 장하나 등은 끝없는 추락으로 지금은 각각 LPGA 투어 시드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시드를 잃은 상태다.

지난해 10월15일 전남 해남 파인비치 골프링크스에서 열린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 2025 미디어데이에서 유해란(왼쪽부터), 윤이나, 김효주, 한나 그린, 야마시타 미유, 김아림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

태극낭자들은 올 시즌 초반 LPGA 5개 대회에서 벌써 2승을 합작했다. 30대 베테랑 선수들의 활약이 고무적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활약에만 기대선 안 된다. 2010년대 정점을 찍었던 K-골프의 힘은 사실 화수분처럼 스타가 쏟아져 나왔던 KLPGA 투어의 성장에서 비롯됐다.

KLPGA는 지난해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내 투어 선수들의 해외 투어 활동을 막는 규정을 바꿨다. KLPGA는 해외 대회와 국내 메이저 대회의 일정이 중복될 경우 국내 메이저 대회 출전을 의무화했던 기존 규정을 폐지해 선수가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KLPGA 투어 선수가 해외에서 개최되는 LPGA 투어 및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메이저 대회에 참가해 상위 성적을 거둘 경우 해당 순위에 대해 국내 메이저 대회와 동일한 대상 포인트를 부여하기로 했다. 잠재력 있는 선수가 ‘우물 안 개구리’로 남는 걸 막겠다는 취지다.

김효주는 이번 포티넷 파운더스컵 최종 4라운드 18번 홀(파5)에서 공을 2차례나 벙커에 빠뜨리고도 보기로 막으며 끝내 우승(16언더파 272타)을 차지하고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한동안 깊은 벙커에 빠졌던 K-골프는 올해 화끈한 벙커샷을 날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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